불붙는 것

零/壱2022. 8. 6. 00:27

……, 어이! 비메이!”

 

눈을 떴다. 어깨를 붙잡고 세차게 흔들던 하쿠쵸가 몸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어지간하면 변하지 않는 얼굴에 스쳤던 걱정이 순식간에 지워지는 것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나 잤어……?”

그래. 츠보우치 씨가 애들은 많이 자는 법이니 그냥 두라고 했지만…….”

나는 애는 아니지만이런 몸으로는 설득력이 없나.”

 

자고 있던 해먹에서 몸을 일으켰다. 팔이며 다리에 그물 자국이 찍혀 있었다. 이미 저만치 떨어진 하쿠쵸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뭐야, 할 말이 있으면 해.”

요새 자주 그러던데.”

, 정말! 한 번에 똑바로 말해. 뭐가?”

……내가 본 것만 두 번이고, 동화작가 녀석들이나 네 스승들이 걱정하는 걸 들었다. 잠들 때마다꼴이 말이 아니라고.”

 

하쿠쵸는 돌려서 말했지만 나도 알고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땀 때문에 기분이 나쁘고, 머리가 아팠다. 잘 때의 일은 직접 알지 못하지만 몇 번이나 들었다. 자는 동안 보통 악몽을 꾼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신음하고, 뒤척이고, 가끔은 발작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하게 앓는다고 했다.

 

의사에게 가 보는 게 낫지 않나? 적어도 사이토라든지…….”

답지 않게 걱정했나 보네. 괜찮아.”

 

호의가 단박에 거절당하자 하쿠쵸는 눈썹을 삐딱한 각도로 세웠다. 그러면서도 더 말하지 않는 솔직하지 못한 모습이 우스워서 몇 가지 더 말해주기로 했다.

 

이미 사서 씨랑 사이토 씨한테 얘기해 봤어. 별다른 문제는 없고더워서 그런 게 아닐까 하던데. 그런 것치고 심하긴 하지만.”

더워서?”

불타는 꿈을 꾸니까.”

……

 

그리고 하쿠쵸가 더 반응하기 전에 사서실을 나왔다. 뒤에서 혀를 차며 나온 그가 사서실 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하쿠쵸는 괜찮은 녀석이다. 여러 번 되묻거나 끈질기게 달라붙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켄지, 난키치, 미에키치에게는 말해주지 않은 꿈 얘기를 그 녀석에게는 할 수 있었다(그렇다고 저 애들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 그것도 다 말하진 않았지만.

 

하쿠쵸가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같은 곳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도서관에서 가장 발길이 적은 곳, 사서나 알케미스트들만 가끔 가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문호들에게 금지된 곳은 아니지만 갈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여태 아무도 개인적으로 간 적은 없었다. 사서가 문호를 개화시킬 때나 불려가는우리의 책이 있는 곳이다.

내 책을 뽑았다. 붉은 표지에는 붓글씨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무기가 되는 책과는 다르게, 아무 무늬도 없고, 생전에 낸 어떤 책의 표지와도 닮지 않고, 마치 백과사전의 각 권처럼 단순한 표지다. 하지만 내 책은, 확실히 다른 문호들과 다르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책을 채우고 있는 종이는 깔끔한 백지. 쪽수가 적혀 있을 위치에만 무언가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적혀 있다.

책을 덮었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서 양초가 탔다.

여기에 없는 나는 이 도서관의 망령이다.

 

 

어느 날 사서 씨가 불러서 나는 사서실에 갔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곧 식사 시간이니 길지 않겠거니 싶었다. 내가 도착하자 사서 씨는 다짜고짜 말했다.

 

실험을 도와줄래요?”

?”

 

하여튼 누구도 바로 말하지 않는다. 일부러 그런 것인지, 반사적으로 찡그리는 나를 보고 사서 씨가 히죽히죽 웃었다. 연구 같은 걸 하면 성격이 나빠진다는 편견에 힘을 실어준다.

사서 씨는 입에 발린 말로 사과하면서 책을 한 권 꺼내 올려놓았다. 사서 씨가 자주 쓰는 플라스틱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어제 책 정리하다가 읽었는데…… 궁금해져서 나도 해보고 싶었어요.”

 

책을 집어 들고 나는 고개를 기우뚱했다. 거기 있던 책은 무슨 과학 이론 책이 아니라 신화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린이용으로 엮은, 글씨가 크고 만화 같은 삽화가 잔뜩 들어간 것이다. 내가 연금술에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신화라고 할 만한 시대에는 연금술이 없었다고 아는데.

돌아보자 사서 씨는 여전히 히죽히죽 웃으며 내가 든 책을 가리켰다. 성격 진짜 나쁘네. 입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갈피가 꽂힌 곳을 펴고 읽었다. 긴 내용이 아니라 선 채로 다 읽을 수 있었다.

 

……이걸 하고 싶다고?”

 

어느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서 씨가 내 뒤에 서 있었다. 사서 씨의 손가락이 어깨를 감싸는 게 느껴져서 나는 몸을 움츠렸다.

 

. 선생님도 궁금하지 않아요?”

 

손가락이 피아노를 치듯 잡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사서 씨의 목소리는 전혀 노랫소리 같지 않았지만. 흔해 빠진 비유지만 그것은 뱀과 같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전혀 궁금할 리가 없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으니까.

 

 

그렇게 사서 씨의 기묘한 실험에 동참하기는 했지만 내가 할 일은 전혀 없었다. 그 점을 지적하자 사서 씨는 또 웃으며 초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

전에 갖다준 그런 초요. 젤보단 단단한 게 좋겠지만 밀랍이 있으니까…… .”

이미 다 알고 있구나.”

아하하, 들켰다.”

 

그래서 나는 동의 외에는 전혀 할 게 없었다. 사서 씨가 모든 준비를 끝내고 그걸 실행에 옮길 때나 불려갔을 뿐이다.

그 날 낮에 나는 쇼요 씨와 하쿠쵸와 나오키와 도서관 마당에서 수박을 깨고 그것을 쪼개 나누어 먹었다. 도서관다운 피서를 끝내고 들어오자 현관 한가운데 사서 씨가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깜짝 놀랐다. 납량특집이었다면 성공이다.

 

다 됐으니까 마지막으로 같이 나가요.”

, 알았어……. 부채만 들고나올게.”

지갑도 가져와요. 버스 타고 가야 하니까.”

그래…….”

 

그래서 쇼요 씨와 다른 녀석들과 헤어지고 나는 동전 지갑을 들고 사서 씨를 따라나섰다. 사서 씨는 조금 큰 유리병을 들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바다에 내렸다. 도서관에서도 조금 보이는 가까운 바다다. 나가고 싶지 않아서 도서관 안에서 수박을 쪼갰는데 이러면 의미가 있나

내 고민은 모를 사서 씨를 따라 좁은 곶 끝까지 갔다. 맞은편 항구 쪽에 등대가 있지만 큰 항구가 아니라 정박한 배들은 작은 고깃배나 요트 정도다. 모래사장은 버스에서 내리고 다른 방향이었다.

 

봐요. 잘 만들었죠.”

 

방파제를 조금 밟고 내려왔다. 사서 씨는 고향이 여기라더니 오래 다녀본 것처럼 미끄럽지 않은 곳을 골라 밟고 가장 아슬아슬한 곳에 섰다.

사서 씨가 내게 건네준 건 유리병에 든 초였다. 역시 만들 줄 알았다. 내가 사서실에 놓아둔 젤 캔들과는 다르게 단단하게 만든 붉은 초였다. 그림은 그리지 않았다. 역시 악취미다. 파는 것과 다른 점을 찾을 수 없을 정도라서, 종이로 된 투박한 심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정말로.”

. 정말로. 밀랍으로 만들었어요.”

 

사서 씨는 내게서 도로 초를 받아서 있는 힘껏 던졌다. 깨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유리병의 마개도 밀랍으로 봉해놓은 사람이다. 그것도 알아서 했겠지. 유리병은 조금 가까운 바다에 떨어졌다. 가깝다고는 해도 주우러 가다간 빠질 거리였다.

물결을 따라 유리병은 점점 멀어졌다. 사서 씨는 그것이 수평선까지그 이전에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서 있다가 방파제를 밟고 올라왔다. 나는 그 이전에 진작 올라와서 사서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사서 씨는 내게 라이터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서 사서 씨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자 사서 씨는 또 히죽 웃었다. 이 사람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 걸까. 밖이라 나는 피울 수 없었다.

우리는 별다른 대화 없이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도서관에서는 남은 수박으로 화채를 만들고 있었고 나도 사서 씨도 종이컵에 담아 돌리는 화채를 받을 때까지만 함께 있었다.

 

그 후로는 예전처럼 사서 씨가 나만 불러내는 일은 없었다.

비밀이라는 말은 한 적 없지만 알았다. 이 실험은 나와 사서 씨만 아는 비밀이어야 한다.

 

 

꿈을 꾸기 시작한 건 그 날부터다. 불타는 꿈이다. 불탄다기보다는 녹는 꿈일지도 모른다. 꿈이니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텐데 여름이어서일까, 깨어나면 제대로 기억도 못 하는 아픔이 명치께에 들었다. 잠만 들면 그 꿈을 꾸어서 제대로 잠들지 못하게 됐다. 낮잠이 는 것도 그래서이다. 결국 그때마다 또 같은 꿈을 꾸지만.

사서 씨에게 따졌지만 사서 씨는 처음 듣는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놀린다면 몰라도 거짓말은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서 씨가 사이토 씨에게 데려가 이야기를 듣자…… 만족할 만한 대답은 역시 나오지 않았지만. 얼추 설명을 듣고 나오는 길에 사서 씨가 말했다.

 

선생님, 걱정하고 있어요?”

 

불탈까 봐 걱정한 나머지 꿈을 꾼다니. 어린애도 아니고.

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은 이전 삶에도 해본 적 없고, 이번 삶에서도 처음이니까. 그리고 마지막이다.

 

넌 또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거야?”

그야, 선생님, 유리병이 깨져서 물에 빠져버릴지도 모르는데 그 가능성은 전혀 걱정하고 있지 않잖아요.”

 

그게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사서 씨는 악동처럼 웃었다.

 

역시 선생님으로 하길 잘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래도 사이토 씨가 준 진정제나 조금, 제법, 상당히 헛도는 상담이 약간은 듣기 시작해서 내 꿈의 불길은 아주 조금씩 꺼져갔다. 이대로라면 여름이 끝날 즈음에는 아마 예전처럼 잠들 수 있겠지. 깨어나면 가슴에만 남는 뜨거운 아픔도, 사그라드는 종이의 냄새도 이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꿈이 끝난 후에도 나는 악몽을 꾸리라. 알고 있다.

 

 

친구들과 나가는 도중에 사서 씨와 마주쳤다. 사서 씨는 흡연실에서 오는 중이었는지 담배 냄새가 났다.

 

사서 씨!”

사서 씨, 안녕!”

~ 안녕하세요. 어디 가요?”

조개껍데기 주우러 가. 초 말고도 뭔가 만들 건 많을 테니까.”

 

사서 씨와 눈이 마주쳤다. 사서 씨는 내 쪽으로 고개를 숙이면서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선생님은 멜레아그로스가 될까요, 노르나게스트가 될까요.”

 

다시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는 것처럼 어깨를 차례로 누르고 떨어졌다. 사서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웃으면서 우리 모두를 보고 미에키치의 말에 하는 대답처럼 이어 말했다.

 

그거 정말 기대되네요.”

 

하하. 퍽이나.

 

나는 하나도.”

 

 

바다 위를 떠도는 유리병 속의 망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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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없는 편지

零/壱2022. 6. 7. 01:05

2020년에 통판한 문호와 알케미스트 게스트북 「제국도서관 회고록」에 참가한 작품입니다. 허락 받고 공개해요!

뭔가 후기로도 주절주절했는데 그것까지 올리긴 그렇고… 폰트 차이를 넣는 것도 웹으로는 생략되겠네요. 책이 있으시다면 그쪽을 잘 부탁드립니다.

창작 사서 설정이 은근슬쩍 등장합니다. 이름은 안 나오고 그렇게 중요하진 않아요.

어설픈 호러라 사실 그렇게 무섭지는 않겠지만 무서울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무서운가?

 

더보기

 

글을 쓰는 사람들이란 필연적으로 시야가 넓기 마련이다. 관찰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것을 쓸 수 없다. 집중하지 않아도 될 때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도 그것으로 인한 버릇이다.

그러니 눈 내리는 날 장에서 과일과 간식거리를 한 아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나카노와 호리가 그것을 발견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시게지, 이것 좀 봐.”

 

길가에 있는 전신주에 붙은 전단지를 먼저 발견한 것은 호리였다. 나카노가 아닌 것은 호리 쪽이 더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호리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야 글자를 볼 수 있는 위치에 붙은 전단지에는 인쇄한 것이 아니라 붓으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소중한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영혼을 담아 사례하겠습니다.

 

 

무엇을 찾는지는 몇 번을 읽어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아래는 멀지 않은 곳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전단지였다. 코팅이 되어 있지도 않고, 전화번호가 쓰여 있지도 않았다.

무릎을 거의 꿇다시피 앉아서 보고 있다가 나카노는 주소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간단한 문장을 외울 때 나오는 사소한 버릇이다.

도서관으로 돌아간 그들은 제일 먼저 식당에 과일과 빵을 놓고, 두 개의 사서실에 간식거리를 채워 넣은 후에 종이와 펜을 들고 담화실로 향했다. 몇 명의 문호가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이 유별난 것은 아니라 가벼운 인사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식탁 하나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소곤거리듯 종이를 펼치고 거침없이 편지를 써 내려갔다. 물론 펜을 잡은 것은 호리였다. 나카노가 옆에서 불러주는 것을 바른 글씨로 받아 적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하다.

 

 

전단지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귀하께서 찾고 계시는 분실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장은 이 편지를 보낸 주소로 주시면 됩니다.

 

나카노와 호리 씀

 

 

일사천리로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어 도서관을 나섰다. 도서관에서 삼 년 넘게 생활하면서 모든 문호는 소리 내지 않고 빠르게 걷는 법을 알았다. 이 도서관에 가장 먼저 불려온 그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나서는 느긋하게 돌아왔다. 도서관에 들어오기 전, 나카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지?”

 

호리는 그것에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고 둥근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야.”

 

도서관의 사람 중 크게 나쁜 감정을 가진 상대는 없지만, 이 일을 알게 되면 다소 곤란한 사람들은 있었다. 활을 쏘는 모임은 절대 이 화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집요하게 파고들게 되면 일상은 소재가 되고 그건 자극이 된다. 이야기가 그렇게 숨이 멎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 도서관에 모인 이들은 정부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글을 쓰는 이들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에 매달리는 것은 모두의 직업병이다. 나카노와 호리도 당사자가 아니었으면 궁금해했을 이야기이다. 모든 게 해결되고 나서 펜을 잡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것을 최대한 미뤄둔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일상에 대한 예의이다. 상대가 잃어버린 것을 찾거나 아주 포기할 때까지, 이것은 이야기의 소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되었다.

그걸 말한다고 이해해주지 않을 사람들인 것은 또 아니지만 결국 이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경계이다. 소문으로 흐름이 만들어지면 그것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해도 그들은 결국 작가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결심도 무색하게, 결과적으로 도서관에 그들의 비밀은 알려지고 말았다. 그것도 하루만의 일이다.

나카노는 발치를 맴도는 고양이를 내리깐 눈으로 한참 쳐다보았다. 호리는 그런 나카노의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사서가 긴장 때문인지 굳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 있었다.

 

선생님들의 안전을 위한 거예요.”

하지만 검열이야.”

내용은 보지 않았어요!”

저어, 그러면 안전을 논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아직은 먈이지.”

 

고양이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나카노는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웬만한 일은 다소 융통성 있게 넘어가는 알케미스트들과 달리 이 고양이는 지나치게 엄격하다. 그들이 빠뜨린 공무원의 미덕을 죄다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편지를 눌렀다.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사서를 돌아보고 말했다.

 

뒤집어댜오.”

, !”

 

사서가 후다닥 편지를 뒤집었다. 뒤집은 면에는 편지 봉투에 당연히 실리는 정보가 적혀 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고양이는 앞발을 받는 사람에 올렸다.

 

도서관 외부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을 텐데.”

……아주 위험햔 일이다.”

……처음 듣는걸.”

 

그때부터는 고양이와 나카노의 설전이었다. 일단 그 둘을 소환한 건 사서였고, 호리 역시 같은 이유로 불려왔으나 둘이 말로 치고받고 하는 동안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서는 테이블에서 벗어나 호리의 옆에 앉아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당장 끝날 것 같지 않네요.”

말려야 할까요?”

그것보다저렇게 말하면 목이 마를 테니까 차라도 끓이는 게 어떨까요?”

 

조수 경험이 많은 호리가 익숙하게 차를 끓이러 간 동안 사서는 혼자 둘을 말려보려 애썼다. 표현의 자유, 국가 기밀, 파업이며 태업이며 온갖 말이 오가는 탓에 금방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래서 저게 무슨 편지인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

모른댜. 내가 뜯어보면 정말로 검열이니까.”

 

소리 없이 테이블 위에 찻잔이 놓이고 나카노는 거칠게 고양이가 앞발을 걸치고 있는 편지를 낚아채 뜯었다. 그것을 저지하려던 고양이와 실랑이를 하다가 고양이가 찻잔들을 치는 바람에 차가 쏟아지고, 네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분실물을 찾아주겠다는 편지일 뿐이니까!”

뭐 하는 거냐, 편지를 내놔랴!”

, 아야, 아뜨뜨뜨…….”

탓쨩 선생님!”

 

뒤이어 요란하게 잔 깨지는 소리가 나자 말싸움이 멈췄다. 차를 내려놓다가 그대로 날아오는 찻물을 맞은 호리가 팔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고양이도 나카노도 놀란 표정을 짓고는 그 주변으로 달려갔다.

 

타츠, 괜찮아?!”

잉크 가져왔어요!”

무슨 일인 거냐?!”

 

사서가 원고지를 펴고 수복식을 적는 동안 고양이와 나카노는 상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깨진 조각으로 난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다가 나카노가 조각을 치우고 고양이가 수건을 물어오자 호리는 소매를 걷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이제 다 싸운 거지?”

…… 미안해, 타츠.”

……미얀하게 됐다.”

선생님이 여러 번 개화한 몸이라 그나마 다행이에요…….”

 

사서가 식이 적힌 원고지를 붕대 정도 너비로 찢어 호리의 팔에 감는 동안 나카노는 고양이를 돌아보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뜯은 편지를 펼쳐 고양이의 앞에 내밀었다. 마시지 못할 차 냄새가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혔다.

 

어제, 분실물을 찾는 전단지를 보고 보낸 편지의 답장일 뿐이야. 도서관 밖으로 편지를 보낸 건 처음이긴 한데, 답장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고……. 애초에 정부는 몰라도 사서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

정부는 왜 모르는 거냐.”

 

나카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양이도 그것까지 캐묻진 않고 대신 편지를 훑어보았다. 인쇄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가지런한 붓글씨였다.

 

 

나카노 님과 호리 님께

 

두 분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하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물건이었을까요, 추억이었을까요, 동물이었을까요, 사람이었을까요.

무엇이든 짚이는 게 있거든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의미로 위험햔 편지인 것 같은데.”

그만큼 절실해 보이는 것뿐이에요. 직접 대면할 일도 없을 거고,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그리고 다른 문호들에게는 되도록 비밀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덕분에, 여태 소란에 가려진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양이와 나카노와 호리와 사서는 그때 사서실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틈에 바싹 붙어 안을 들여다보는 불안한 청색 눈이 시선을 알아채고 뒤로 물러났다.

 

우와앗!”

, 사쿠!”

이런, 들켰네. 다들 안녕.”

 

태평스러운 목소리로 아쿠타가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멋쩍어하면서도 뒤를 이어 무로와 하기와라가 쭈뼛쭈뼛 들어왔다.

 

엿보거나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깨지는 소리에 싸우는 것 같은 낌새가 나서.”

, 사서실에서 싸우다가 잘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랬어……. 사서 씨의 만년필이 망가지거나, 유리창이 깨지거나, 그러면아주 슬퍼할 테니까…….”

하기와라 선생님……!”

감격하고 있을 때냐!”

 

사서가 어쨌거나 나카노와 호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문밖에 다른 문호들이 있지는 않았다. 세 사람을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자 사서가 이번에는 빼놓지 않고 문을 잠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드릴게요.”

 

그리고 편지 하나로부터 시작된 검열의 의혹과 편지 쟁탈전 중 희생된 찻잔 네 개와 찻주전자 하나, 호리의 팔에 대한 이야기를 사서가 늘어놓았다. 편지에 대한 얘기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듣던 세 사람은 날아간 찻잔과 마시지 못하게 된 차와 호리의 팔에 대한 얘기를 듣곤 사색이 되었다.

 

탓쨩코, 팔은?”

, 이제 괜찮아요.”

아직 안 괜찮아요. 내일이면 식을 풀어도 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요. 하루 정도 무거운 걸 들면 안 돼요.”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아니,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한 거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호리는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편지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사서실에서는 차 냄새가 빠지기 시작했다. 아쿠타가와가 담배를 물었지만 사서가 비명을 지르며 막았기 때문에 불을 붙이진 않았다.

 

그런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지. 걱정 마, 탓쨩코.”

하쿠 씨에게는 하마터면 말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쿠슈 선생님은 이해해주실 테니까…….”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

 

나카노가 다시 한번 말을 맺자 무로와 하기와라와 아쿠타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알게 됐지만 거기서 그쳤다. 고양이는 더 이상 이 건에 대한 편지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중간 과정을 생각해보자면 결말은 평화롭게 난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답장이긴 하네. 너희 둘, 귀신에게 홀리거나 한 건 아닐까? 혹시 모르니까 주소로 직접 가보거나 하지는 마.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아주 슬플 테니까.”

아쿠타가와 이 녀석, 그런 불길한 소리나 하고.”

 

사서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렇게 말하며 아쿠타가와는 사라졌다. 무로의 말에도 느긋한 웃음소리만 복도에서 들려왔을 뿐이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매일 편지를 썼다. 답장이 도착하는 것이 너무 빨라(하루 만에 도착했다) 편지를 가져다주는 사서에게 묻자 대답이 돌아오긴 했다.

 

여긴 수도니까요. 아마 집배원분들이 아주 빠르신 게 아닐까요?”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은 별것 아니다. 거리에서 발견한 물건과 도서관에서 나온 분실물의 목록을 세세하게 적어 이 중에 찾는 물건이 있느냐는 편지였다. 그러면 답장은 매번 똑같은 문장으로 도착했다.

 

성의에 감사드리지만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의 편지와 다른 것이라는 것은 매번 손으로 쓴 편지라 글씨가 아주 사소하게 다르다는 것 정도였다. 맥이 빠질 만큼 단순한 반복인데도 두 사람은 지치지 않고 분실물을 찾아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고 분실물을 찾는 데 하루 온종일을 쓰지는 않았으므로 비는 시간에는 장을 보러 가고 밭을 구경 가고 잠서를 하고 글을 썼다. 원고지에 무심코 기모노와 어울릴 만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지갑으로 사용함)’라고 적다가 종이를 구겨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반년이 가도록 원하는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똑같은 문장의 편지가 백 장이 넘게 쌓이자 아무리 두 사람이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매번 꼬박꼬박 전해오는 편지에 질책이라곤 한 획도 없었음에도 그랬다. 차라리 그랬으면 더욱 불이 붙어 찾는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은 분실물 찾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본업이 있는 이상 그것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태 사서의 배려로 주요 회파에서 제외되어 있던 것도 되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동안 찾은 수백 개의 분실물 중 수십 개는 주인을 찾아 돌아갔고 그 외에는 도서관에 놓여 여전히 주인을 찾고 있거나 처분되었다.

더 이상 분실물을 찾을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고 둘은 사서에게 가 다시 제1회파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찾으신 건가요?”

 

만년필을 들고 회파에 둘의 이름을 적는 사서가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물어왔다. 기대를 배반하는 것 같아 조금 망설이게 하는 목소리였다.

 

아니, 이대로는 본업에 지장이 갈 테니까 슬슬 그만두려고.”

. 더는 찾을 수 없겠다는 편지도 보냈어요.”

…….”

 

예상대로 사서의 눈썹이 보기 쉽게 처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여태 얼마나 많은 편지를 보냈는지 알았기 때문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서는 웃으면서 뭔가 얼버무리고는 인사를 하고 담화실을 나갔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사색이 된 사서가 종이를 쥐고 도로 뛰쳐 들어왔다. 도서관 본관이 아니기 때문에 단속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곤 해도 다급한 발소리 때문에 들어오기 전부터 누군가 뛰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무슨 일이세요? 두고 가신 거라도 있나요?”

, 물 좀 마셔봐.”

 

건네준 물컵을 받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서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편지 봉투였다.

 

, , , 이거……

이시카와 씨?”

도서관의 책이 담보?”

선생님들한테 온 편지예요! 하지만 오늘 보냈다고 하셨죠? 답장이 이렇게 빨리……?”

 

편지는 오늘 아침에 보냈다. 그것을 떠올리고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편지를 아무리 빨리 배달한다고 해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서가 고양이를 부르러 뛰쳐나간 사이에 수신인인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봉투를 뜯었다.

늘 편지를 써 보내오던 질 좋은 종이에, 마찬가지로 가지런한 글씨가 적혀 있다. 붓질 한 번도 허투루 하지 않은 편지는 역시 그 사람이 보낸 것이다.

 

나카노 님과 호리 님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두 분을 붙잡기엔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답례라고 하기는 약소하지만, 부디 폐옥あばらや에 두 분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답장은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총총, 쿠치나시口無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두 사람은 현관에서 사서가 건네준 우산을 들고 굳은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편지의 이야기를 듣고 고양이가 단어 그대로 펄쩍 뛴 것이 떠오른다. 놀란 고양이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건 처음 알았다. 고양이는 펄펄 뛰었고, 사서는 걱정스러운 몸짓으로 도서관 안을 온통 돌아다녔지만 어째서인지 불허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랬다. 마치 여름이 그렇게 만든 것처럼.

다른 문호의 눈에 띄어서는 곤란하므로 명목상으로는 사서의 심부름을 가는 것이 되었다. 대신 들러 인사를 드릴 곳이 있다는 설정이라고, 그래도 여태 심부름에 굳이 쫓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중은 나오지 못한다고. 사서실에서 두 문호를 보내며 사서가 울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대신 동생인 쪽 사서가 마중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바람은 불지 않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어깨를 두드린다. 빗방울이 우산과 발치에 떨어졌다. 어쩐지 무겁기 그지없는 분위기로 말없이 비 오는 거리를 걷다가 문득 도서관을 돌아보면 그 커다란 건물의 대문이 어쩐지 영영 열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녀오라고 했으니. 그러다 문득 둘 다 오늘은 연금동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지정된 시간 동안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일반동의 업무에 비해 연금동은 지정된 횟수의 잠서만 해결한다면 여유로운 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하다. 언제라도 뒤따라올 수 있도록.

계속 생각하다가 걸음이 늦어진 나카노가 그것을 먼저 알아차렸다. 열 보쯤 앞에서 기다리는 호리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이자 호리의 얼굴은 향이 번지듯 밝아졌다.

 

잘 됐다! 그렇지, 시게지?”

책 밖이니까 절필할 일도 없을 거야.”

 

애초에 편지를 보낸 이가 한 것은 초대뿐이지만 어째서 절필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이 가느다란 감각이 예지였을지도 모른다고 돌이킬 수 있을 것이었기에, 이때 나카노는 자신이 왜 절필을 입에 담았는지 잠깐 생각했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아무튼 간에 분위기가 조금 들뜬 것은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수다스럽지는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는 분위기가 늘 둘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침묵에는 조금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리를 잡담으로 헤쳐 나가다가 호리가 걸음을 멈췄다. 이 거리엔 들어선 적이 없다. 그러니 처음 보는 것이 당연한 길이 마치 이경의 것 같았다. 물에 젖어 검게 보이는 돌바닥에 비를 맞아 떨어진 치자꽃이 무늬처럼 흩뿌려 있었다. 빗소리에 섞여 치자 향이 흘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한테 편지를 보낸 사람 이름도 쿠치나시였지.”

? 아아, 그러게. 그래서 여기에 치자를 심어놓은 걸까. 나랑 취향이 맞으면 좋겠는걸. 맞다, 내 문학기를 치자기라고 하는 모양이야. 마침 조만간이기도 하네.”

, …….”

미안. 웃으라고 한 말이었어…….”

 

떨어진 치자꽃을 밟으며 그 수상한 집 앞으로 발을 들였다. 폐옥이라는 표현은 역시 단순한 겸양어일 것이 분명한, 근사한 일본식 저택이었다.

문 앞에는 놋쇠로 된 우편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고풍스러운 우편함은 비를 맞아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리 거둬간 것인지 남아 있는 우편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 집초인종이 없네.”

 

호리가 그렇게 말해서 나카노도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고 해도 맨손으로 가는 것은 신경 쓰인다고 사서들이 챙겨준 밤 만주 상자가 젖지 않게 고쳐 안고 초인종을 찾아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고리를 잡아두드리자 사이를 두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열었다면 꽤 위험한 습관이다. 손님이 그런 것을 타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문 너머에서 밖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지금 찾아온 이 둘은, 악의를 가진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호리와 나카노인데요…….”

 

문 근처에 세워둔 빗자루가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호리는 밤 만주 봉투가 젖는 것도 잊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사람이 없네.”

초인종은 없는데 대문은 최첨단인 걸까.”

 

가능성이 낮은 말이라도 뇌까리며 반들반들한 돌로 놓은 길을 따라 걷자 곧 징검다리가 나왔다. 본채는 커다란 연못 위에 지어 있었다. 연못에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수면을 전부 덮어버릴 정도로 수련이 피어 있었다. 다리가 놓인 곳은 조금 바닥이 높아 야트막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꽤 깊어 보였다. 징검돌 위에도 물이 조금 깔려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마루에는 빗방울이 조금 튀어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현관까지 가자 쇼지가 열리고 후리소데 기모노를 입은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릎을 꿇고 앉았는지 긴 검은 머리가 다다미 바닥에 깔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카노 님, 호리 님.”

 

그러더니 엎드려 절을 했다.

 

안녀, 으앗!”

타츠!”

 

그 바람에 놀란 호리는 징검돌에서 미끄러져 연못에 빠질 뻔했다. 나카노가 급히 붙잡아 물에 빠지는 불상사는 막았지만 들고 있던 밤 만주는 봉투째로 날아가 연못 어딘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과하는 두 사람에게 주인은 괜찮다는 것처럼 손을 저었다. 표정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이 집의 주인은 성별도 나이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전등도 없이 촛불만 켜진 방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얼굴은 어쩐지 창백해 보였다. 소매 밖으로 간신히 나온 손가락은 가늘고 길고, 손톱은 손가락 끝까지 바짝 짧은 상태였다.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찾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것도 운명이겠지요. 누추한 곳이지만 부디 편안히 있다가 가세요.”

 

그리고 다시 절을 했다. 어쩐지 마찬가지로 절을 하면서 두 문호도 인사를 했다.

 

나카노입니다.”

호리입니다. 으으죄송합니다. 선물로 사 온 밤 만주가연못이…….”

괜찮습니다. 오늘은 제가 두 분을 대접하려고 부른 것이니까요. 연못은 걱정하지 마세요.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긴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며 지났다. 어째서인지 걸어갈 때마다 후스마는 저절로 열렸다. 몇 개의 방을 지나 가장 안쪽의 방에는 다다미 여섯 칸은 너끈히 차지할 만한 상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마음껏 드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다는 못 먹……? 어때, 시게지?”

타츠…… 아무리 그래도 너랑 둘이서는 좀 많아.”

 

주인은 상석에 두 문호를 앉히고 비가 오고 있지만 밖이 보이도록 쇼지를 열어 문가에 물러서 앉았다. 비가 오고 있어 시시오도시의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조용한 식사 시간에 주인이 몇 번인가 말을 건네 왔다.

 

두 분은 펜을 자주 잡으시는 모양이지요. 편지에 쓰인 글자에서 그런 것이 느껴졌어요. 도서관에서 보낸 편지였으니 직원이실까요? 책이 많은 곳에서 살면 그런 교양도 몸에 배는 걸까요?

늘 같은 글자로만 쓰여 있어서 아마 편지를 쓰는 것은 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다른 한 분의 글씨도 보고 싶었는데 결국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쉽네요.”

 

질문이 섞인 말에 대답을 하려 입을 열면 주인은 손을 저으며 두 손으로 상을 가리켰다. 가만히 지켜보는 눈빛에는 부드러운 압력이 깃들어 있어 입을 다물고 젓가락을 고쳐 쥘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는 주인의 뒤에 놓인 후스마가 조금 열리고 주인이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 짧은 말이 오갈 만한 사이를 두고 주인이 직접 후스마를 닫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기묘한 초대는 끝나는 인사까지 일반적이지 않았다. 주인이 다시 후스마를 열고 너머로 지나가기 전에 나카노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후에라도 물건은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후스마가 닫히기 전 문틈으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상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도 분명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지금 찾았답니다.”

 

.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도 없이 주인이 점차 멀어져갔다. 문을 바라보다가 상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 차려 있던 음식은 온데간데없이 아무 무늬도 없는 접시 위에 석류가 세 개 놓여 있었다.

 

먹지 않는 게 좋겠지.”

석류라니 누가 봐도 수상해.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온 방향대로 따라 나왔다. 다다미만 놓인 바닥이 끝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바깥으로 이어지는 쇼지를 열어도 보이는 것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연못이다. 심각한 일인데도 이 연못 어딘가에 밤 만주가 가라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에 분위기가 조금 가시고 말았다.

 

안 되겠네. 남의 집이라 이러진 않으려고 했는데. 뛸 수 있겠어?”

너무 오래라면 어렵겠지만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시게지야말로. 지금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하고 있지 않아?”

 

위기일발의 상황에 나오는 버릇이 들켜 버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일단 지금 추궁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후스마는 저절로 열렸기 때문에 달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지치면 잠시 앉아서 발을 주무르며 쉬고, 다시 달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변화가 없는 방에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바닥에 처음에는 한 알, 다음에는 통째로 하나, , 세 개의 석류.

달리다 밟아 으깨 다다미 틈으로 스며드는 석류의 과즙이 마치 핏물 같았다. 발바닥을 따라 자국으로 남는 흔적이 참극처럼 보였다. 에도가와의 작품에 석류라는 제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용과는 관계없겠지만 이 상황 자체는 그가 좋아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도 무사히 나가고 나서야 할 수 있겠지만.

석류 세 개의 방 끝에는 후스마가 아니라 쇼지가 있었다. 저절로 열리지 않는 그 문을 열기 위해 석류즙이 묻은 손을 뻗었다. 창호지에 손자국이 꽃잎처럼 물들고 종이를 잡아 찢듯 문을 붙들어 열었다.

 

밖이다……!”

쫓아오고 있지는 않지? 서둘러야, 물에 빠지지 않게도 조심하고.”

 

서두르면서 게타를 신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 문호가 겨우 신에 발을 꿰었을 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돌아가시나요?”

 

허리를 곧게 펴고 선 집주인이 이쪽을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쩐지 눈빛을 피하고 있으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만 듣고 나카노는 몸을 일으켜 아직 게타 끈에 발을 걸쳤을 뿐인 호리를 붙잡아 당겼다. 징검다리에서 발이 미끄러지기는 했지만 나카노가 단단히 붙잡은 덕분에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한 짝의 게타가 허공을 날아 또 연못 어딘가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 우선 뛰자!”

, ! 괜찮아!”

 

빗물이 남은 풀을 밟고 걷는 맨발의 한쪽 발자국은 여전히 석류즙이 짓이겨지고 있다. 넘어진 빗자루를 무시하고 대문에 걸린 빗장을 밀어 올리고 나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아, 아쉽다. 겨우 적당한 종이 뭉치를 찾았는데.”

 

대문턱을 넘기 직전에 그런 한탄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서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다다미에 발이 쓸리고, 손과 발, 옷 끄트머리가 석류즙으로 엉망인 데다 호리는 게타 한 짝마저 잃어버린 채였다. 그러고 보니 우산도 두고 와 버렸다. 비를 맞고 있으니 손이며 발에서 석류즙이 씻겨 누가 보면 오해하기 좋을 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간도 조금 지났는지 하늘은 조금 어두웠다. 지친 나머지 젖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빗속에 멍하니 서 있자 도서관 방향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선생님!”

선생님들!”

세상에, 꼴이 이게 뭐야?”

우왓!”

사쿠 군, 손잡고 일어나렴.”

 

사서 자매와 편지의 비밀을 알고 있는 타바타 문사촌의 그 사람들이었다. 하기와라는 여기에 오는 길에 몇 번 넘어졌는지 옷이 빗물로 얼룩덜룩했다.

 

사이랑 차를 마시는데 얼마 전에 산 다기 이가 빠져서…….”

영 불안하다 싶어서 사서들을 불러서 와봤는데, 기우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힘을 써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왔어요. 고양이가 엄청 화를 내서도망 나오기도 한 거지만…….”

선생님들한테는 현자의 돌이 있으니까요. 약간 감처럼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 와요.”

, 현자의 돌 굉장하다하쿠슈 선생님께도 드려줘…….”

사는 건 좀 어렵고 위에서 예산을 더 할당해서 내려준다면 드릴게요.”

, 잠깐! 사쿠, 사서 씨! 알겠지만 지금은 하쿠 씨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야? , 시게, 발에 그거 피야? 어쩌다?!”

이런, 탓쨩코, 맨발이 됐네. 업어줄까?”

 

말이 우르르 쏟아지자 아까까지 그렇게 다급했던 것이 거짓말같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발에 묻은 것은 피가 아니라 석류를 밟은 것뿐이라고 설명하고, 게타는 저택의 연못에 빠뜨렸다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코앞의 저택을 돌아본 사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생을 보고 언니 사서가, 나머지 세 문호도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갸우뚱 기울였다.

 

이 집에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까지 멀쩡하던 저택 대신 빗속에도 거미줄이 휘감긴 대문, 무너진 돌담. 그중에서 아까 같이 멀쩡한 것은 꽃이 쏟아진 치자나무뿐이다. 닫혀 있을 터인 대문은 누군가 빗장을 두드려 부순 것처럼 미는 것만으로도 저항 없이 열렸다.

일곱 명이서 두리번거리며 (결국 호리는 아쿠타가와에게 업혔다)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성하게 자란 잡풀과 빗자루였던 것이 분명한 지푸라기 묶음이 눈에 들었다. 깨진 징검돌 사이로도 풀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를 쓸듯 남아 있는 붉은 한쪽 발자국이 빗물에 번진 것만 빼면 멀쩡히 남아 있었다.

 

이건아무래도 내 말이 씨가 된 모양이네.”

아쿠타가와 너…….”

,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용서해 줘.”

 

길을 가로막는 수풀을 헤치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본채가 드러났다. 하지만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한 모양새였다. 대들보에는 버섯이 자라고, 쇼지는 부서지고 구멍이 뚫려 어두운 실내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거멓게 변색한 마루에는 나카노와 호리가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두고 온 우산이 접힌 채 놓여 있었다.

한편 징검다리는 보였지만 연못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집을 둘러싼 연못이 있었을 자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얕은 빗물 웅덩이 말고는 물이 전부 빠진 깊은 바닥에 뿌리까지 말라버린 연꽃 줄기가 덩굴처럼 얽혀있고, 가까운 바닥에는 뒤집혀 떨어진 게타가 있었다.

 

탓쨩코 거지……?”

, 제 거예요. 저래서는 주우러 갈 수 없겠지만…… 정말 깊네요, 연못. 빠졌으면 큰일 났겠어요.”

나중에 장대를 가져와서 꺼내야겠어요.”

 

업혀 있는 호리의 발바닥이 멀쩡한지 사서들이 몰려들어 확인하는 동안 무로가 쇼지를 밀어 열었다.

 

히익, 사이, 조심해……!”

걱정 마, 사쿠. 침식자도 아니고, 여차하면 사서도 둘이나 있으니까.”

사이 씨, 그래도 조심하세요.”

알아, 알아. 걱정 말래도.”

 

조금 미는 것만으로 쇼지는 무너지듯 안으로 넘어갔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쪽을 사서들이 손전등으로 비추니 후스마도 비슷한 꼴로 쓰러져 방이 하나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새였다.

그 안을 종이가 뒤덮고 있었다. 벽이나 바닥을 바르듯 붙어있는 것은 모두 편지다. 거기에 있는 모두가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호리가 펜을 잡고 나카노와 함께 쓴 편지였다. 세어볼 수는 없었지만 반년 동안 보낸 모든 편지가 붙어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 위에 터진 석류 세 알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밟고 다닌 것인지 수십, 수백, 수천, 어쩌면 수십만 개의 발자국이 개미 떼처럼 오가고 있었다. 바닥, , 천장을 가리지 않고.

대문을 넘기 전 들려온 목소리가 가려움증처럼 몸을 긁었다. 쓸 만한 종이 뭉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책. 이 집을 전부 바를 수 있을 만큼 두꺼운, 글씨가 쓰인 종이 뭉치들……. 나카노와 호리는 오한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발자국은 글자를 쓰고 있었다. 열린 사이로 바람이 불어 흩어져 버려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무로는 무의미한 일인 걸 알면서도 누군가 그것을 읽기 전에 무너진 쇼지를 도로 닫았다. 사서들이 우산으로 게타를 어떻게든 건져 신겼는데도 아쿠타가와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빈 연못 속에 던져버리고 호리를 단단히 업고 달렸다. 무로와 나카노는 하기와라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해 대문을 다시 나섰다. 지장보살처럼 쓰러진 녹슨 우편함이 발에 챘다.

그러고도 거리를 떠나 도서관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내 치자 향이 뒤를 따라왔다. 일곱 명 모두가 우산 쓰는 걸 잊은 탓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도서관에 들어올 때까지, 그들을 걱정하며 현관에 모여 기다리고 있던 문호들의 입을 타고 결국 이 편지의 전말이 도서관 전체를 맴도는 소문이 될 때까지, 마치 석류즙이 묻은 발자국처럼 입 없는 꽃의 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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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문호와 알케미스트 비뚤어진 자의 독창(아리아) 감상

零/弐2022. 2. 12. 16:52

안녕하세요. 즐거운 포스타입 온리전과 함께 술 마시고 잠들었었습니다.

슬슬 딜레이 배신 기한도 끝나가서 다시 보고 감상을 써야겠다. 그래서 감상문을 쓰고 있습니다.

 

이하의 내용에는 무대 문호와 알케미스트 비뚤어진 자의 독창(아리아)’ (이하 분게키4)의 스포일러가 뒤죽박죽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 시리즈, 특히 3의 이야기가 조금씩… 은근히… 자주? 등장합니다. 그럴 수밖에

 

더보기

 

처음에 대기하는데 자꾸 도서관 메인 테마(따다다단~ 말고 딴 딴 딴 하는 그거)가 들려서 린나님이랑 같이 왜 이렇게 평화로워?! 하고 난리였습니다. 사실 이렇게 난리일 예정은 2년 전만 해도 없었는데무대3 보면 누구나 이렇게 된단 말이야……

다시 보면서 쓰고 있어서 예전 감상보단 조금 양이 있을지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2월이 나한테 마츠리인걸까? 행복한 한달이에요

 

 

그리고 막상 막이 올라가니까 시작부터 또 난리가 났드만요??? 침식자?들이 들고 나오는 무기도 도서관 문호들의 무기

말렸어말린 결과가 이 꼴이야!”

와일드슈세그럴 상황이 아닌데 멋있어

불이 좀 켜지니까 숫자가 떠다니는데 이거 그거 아냐???? 완전 불온 안건??? 아니 다시 보니까 전생할 때마다 숫자 하나씩 지워지잖아 코요센세 전생하니까 1903이 지워지잖아~~!!

 

정말 무대가 횟수를 거듭할수록 연출이 늘어나네요이렇게까지 카미일 필요가 있나 이렇게까지 갓극이면 외계인이 납치해간단 말야

 

다쟈는 정말 변하지 않고 뛰어다니는 털 세운 고양이 같아서 귀엽죠. 시끄럽고… 개 난리고… 설명해주다가 바타상 전생한 걸 보고 쫓아가질 않나 정말 어딜 가도 빠지지 않는 약방의 감초 몇 마디 말 한 게 한 마디로 논파당하고 무시당하고 잘리고 하는 게 너무 귀여워요. 게키다쟈는 아무래도 좀 더 놀려주고 싶어지는걸까

코요센세는 대사가 늘어서 그런가 좀 더 할머니말투가 되지 않았나요? 텍스트로 보는 것과 보이스의 차이 때문인가… 근데 정말 할머님인걸… 그러면서도 조금 더 친절하고 직접적으로 부드럽고 멋있었어요. 최고야.

슈세와 쿄카는 비주얼이 떴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서로 정반대의 면으로 미인이 아닌가요? 금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와 새까만 머리, 긴 머리(장발까지는 아니지만)와 짧은 머리, 우아하고 화려한 미인과 소박하고 담담한 미인… 아예 분아루 쪽에서도 의도한 디자인이겠지만 배우분들이 너무 찰떡이었어요. 지미하다고 하지 마라 완전 미인이니까

돗포는… 지금 한창 원고 영향으로 이 사람에 대해서 과잉하게 말하게 되니까 자제하겠습니다. 이런 말 하지 마아앗~~ 말투에 기본적으로 조소가 섞여 있어서 좋았네요… 수첩 끈도 핑크색이었지 귀여워

이번엔 리-치가 없어서 스스로 통역도 해주는 바타상. 짧은 말로도 촌철살인을 하고 이 극에서 지금 누구보다도 슈세의 편이 되어줬으니까!! 이거 정말 중요하니까!! 그치만 말을 해주지 않아~~

봄쌤은 늘 고생하는 이미지에 가려지지만 정말 멋진 사람 아닌가요? 정의롭고 의리있고 인정 많고… 멋져서 고생하는 건가? 이번에도 등장하는 씬 전체에서 바타상만큼은 아니지만 슈세이에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어요.

톤톤은 너무너무 귀여워ㅠㅠㅠ 무대 사정상 투척무기를 쓸 수 없어서 무기를 조금 이걸 뭐라고 하지? 클로 종류처럼 쓰는 것도 그렇고 정말 귀엽죠. 좋아하는 선생님한테 매달리는 모습도 너무 귀엽고 이 막내가 어쩌다 극의 세계에… 자주 엉거주춤한 채로 서 있는데 코어 근육도 참 굉장하죠.

 

다들 어째 이전 무대의 기억도 있고, 나중에 등장한 톤톤도 형한테서 전해 들었다고 하고… 어디서 들은 거야? 영○의 좌? 무대끼리의 시간축이 어떻게 되는 거지?? 3시점의 얘기는 안 하지 않아?

 

그리고 무대는 늘 바로바로 침식되네요. 금색야차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수일과 심순애로 유명한 편인데 저는 양쪽 다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번역이 없어… 책이 침식되면 문호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설정 너무 끝내주지 않나요? 게임 쪽에선 상대적으로 덜한데 애니도 무대도 다들 픽픽 쓰러져주셔서… 그리고 코요센세는 정말 머리카락이 긴 분인데 긴 머리가 바닥에 끌리도록 엎드려 있는 건 시각적으로 끝내준다고 생각합니다.

 

오프닝에서도 보이는 액션이 정말 좋아요… 분게키의 장점을 하나 꼽자면 역시 액션이죠. 채찍이나 총 활은 날붙이에 비해 제한이 커서 아쉬운 면도 있지만 그 액션을 하면서 몸놀림이라든지 다양한 게 정말 좋아요. 이번에는 바타의 창술이라든지, 화살을 쏘는 건 어렵지만 활 자체로 공격을 막으면서 발차기~! 최고. 그러고 보니 이번엔 총 문호는 등장하지 않았군요. 액션에서 성격이 드러난달까 쿄카의 액션은 특히 우아해서 보고 있으면 좋더라고요. 제발 봐줘 친구들아 3700엔밖에 안 한다

 

쓰러졌는데도 제자와 책을 걱정해서 나오는 코요센세를 이전의 경험으로 충고하고 부축해주는 다쟈와 돗포,,, 여기서 생각한 게 돗포는 생전에 고로시대의 그늘에 가려서 죽기 직전부터 조명되었던 문호거든요. 인게임 대사도 그렇고 고로시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는데도 이 장면에서! 부축하게 했어! 물론 지금 도서관에 남은 문호가 세 명뿐이고 하나는 환자 본인 하나는 다쟈면 부축의 역할이 이쪽에 돌아가기도 하겠지만!!

 

모나카 너무 귀여워요.

허허허허 쇼키카? 사토…미. 하하하하 뵤키니낫챠우

 

다쟈와 슈세의 독대 씬은 정말 최고였어요 사람을 존경하는 방식과 자신을 믿는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다쟈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극하는 그 말의 내용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었어요… 바타상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다쟈가 바타상과 화해할 수 있는 실마리도 준 거라 뒷부분까지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최고… "지금은 과장된 이미지로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평범하면서~" "평범하면서는 됐어!"

 

오자키 일문끼리의 술자리 장면 너무 가족이었어요. 가족이라고~~!! 가족이라는 걸 부정하면 침식자야!! 취해서 조금 기분 좋아 보이는 슈세랑 필사적으로 말리는 쿄카가 너무 귀여웠어요… 코요센세도 분명 귀엽다고 생각하고 계셨겠죠. 흐뭇한 씬이었는데 왜 이렇게 불안했을까… 하지만 3을 보고 난 후란 말이에요. 3 이후에 오는 건 아무래도 이렇게 된단 말입니다.

 

무대에서 언급한 부의 감정 설정도 좋았어요. 외부적인 감정과 내부적인 감정… 일단 인게임의 침식자들은 대체로 내부적인 감정?으로 태어난 이들이었는데 몇몇은 좀 예외였네요. 이쪽은 침식자 소강상태라 슬슬 자세한 설정은 나오지 않을 것 같긴 한데.

 

그리고 좋은 시절 다 가고 침식을 당합니다. 침식자들은 눈치가 없어? 하긴 있으면 애초에 문학 같은 걸 침식하고 살겠냐마는… 그 동안 슈세가 들었던 어둠의 목소리라는 것 때문에 슈세가 계속 의심당하고 몰려서 지하감옥(왜 있는 건데요)에 갇히고… 아니 근데 왜 도서관 지하에 그런 게 있는 건데요?? 도서관이잖아요?? 도서관이란 뭔가요??

ㅠ 하지만 이 와중에도 다쟈와 바타상은 화해… 서로를 조금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아니 일방적이지만) 다쟈도 각성을 하고!! 믿고 있었다고! (사실 불안해) 슈세를 감시하던 톤톤에게 최면 거는 거 너무 웃기고 귀여웠어요ㅋㅋㅋㅋ 아 톤톤 배우분 원래 앙상블 출신이라 침식자였던 과거를 불러일으키는 건가 어쩌고

 

다쟈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빠져나와 잠서로 쿄카의 책을 구하러 가는 슈세… 예정대로의 개난리… 공포의 감정과 오해로 빚어진 와중에 코요 선생님이 이 코요 선생님이 말입니다… 갑자기 너무 힘들어져서 어휘력이 죽었다. 다 된 것 같아도 어째서 하필 이 셋만 빼고 철수한 걸까요?

… 가짜 코요 선생님이 침식자라는 걸 알아보고 나보다는 널 노릴 거다 한 것도 슈세의 관찰안이었죠. 좋았어요. 좋아할 장면이 아니긴 한데… 이런 거라도 찾아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

… 그 장면 이후에 천장(저희 집 말고 무대)을 계속 봤는데 천이 떨어지진 않더라고요 진짜 3이 잘못했다 이건(과격한 주접의 표현이고 저는 만족했습니다) 침식자 코요센세 연기는 나이 많이 먹은 너구리나 여우 같은 요기가 느껴졌달까 진짜 이번에 연기를 다들 너무 잘 했어요. 연출도 연기도 극본도 다 미치겠다… 분게키쿤… 이렇게 갓극이면 외계인에게

 

각성~!! 하 정말 너무 최고야 (린나님: 현자의 돌을 과금했구나) 이 과정까지 혼자 싸워준 다쟈도 너무너무 기특해요

 

잠서에서 돌아온 후에 슈세를 의심한 문호들이 허리를 굽혀서 사과하는 장면도 좋았어요. 잘못을 순순히 인정할 줄 아는 남자들

선생님의 말씀에서 느껴지는 제자 사랑이 너무 너무 너무 너무예요… 게임에선 좀 더 크고 먼 사람 같은 인상인데(아니 인간적인 면도 많지만 유독 제자들 대상으로는) 극에서 다정함이 극대화되어 있었네요. 어쩌지? 선생님이 아버지인 것 같다

 

 

… 정말 이번에도 기대를 버리지 않는 갓극이었어요. 3700엔으로 이런 거 봐도 괜찮은 거야? 거의 가오나시죠 이거 사금이라도 만들어서 내밀어야 하는데

여름에는 5도 오잖아요. 사실 지금도 센슈락을 볼까말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 일단 도서관에도 가야지

여러 가지 외부적 사정으로(코로나~~) 취소되는 일자도 있어서 다들 정말 고생이겠구나 하고 생각해요… 그래도 정말 좋은 극이라 행복합니다.

 

5의 감상문에서 다시 뵐게요. 겐유샤~~!!

 

 

인어 압화 책갈피

零/壱2021. 6. 20. 00:18

문호와 알케미스트 일본 웹 온리 「想イ集イテ」에서 배포한 비메이+사서 배포본입니다. 한국어가 원본이고 일본어로 번역해 PDF를 만들어서 배포 중이에요.

우선은 문호+사서 표기지만 문사서나 사서문으로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일본어 PDF와 다른 점은 표지와 후기 여부로, PDF도 따로 첨부해 둡니다. 일본어를 읽을 수 있다면 이쪽도 잘 부탁드려요!

 

 

 

조금 어두운 불온한 이야기

연금술(특히 문호의 존재와 보수에 대해) 날조 잔뜩

뭐든 괜찮은 분만 부탁드립니다!!

 

 

더보기

 

, 요정을 꽤 좋아했어요.”

그래? 조금 의외네.”

 

빈 수조를 닦으며 사서가 말했다. 비메이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짧게 맞장구쳤다. 문장이 멈춘 곳에서 펜을 돌리느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사서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다 그러지 않나요? 작고 귀여운 사람이라고 하면 인형 같고. 게다가 살아서 움직이기까지 하잖아요.”

, 어렸을 때 얘기구나. 그러면 그럴 수도 있겠네.”

그래서 지금은 이런 취미가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그제야 비메이는 돌아봤다. 사서는 수조를 닦느라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사서의 취미는 아쿠아리움이었다. 깨끗하고 두꺼운 유리 수조에 각양각색 물고기를 풀어놓고 바라보기를 좋아했다. 사서실에는 수조가 몇 개씩이나 있었다.

지금 사서가 닦고 있는 수조는 사서실에서 두 번째로 큰 것이었다. 가장 큰 것은 한쪽 벽에 붙박이 되어있는 것이라 두 번째라고 해도 제법 컸다. 얼마 전 그 안에 살던 물고기가 전부 죽었기 때문에 사서는 수조를 청소하고 있었다.

떠낸 물고기의 시체는 도서관 밭 한 구석에 묻고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해 뒤뜰에서 물때가 낀 수조를 닦고 있었다. 조수라 지명당해 끌려온 비메이는 물론 수조 청소를 하는 법 같은 건 몰랐고 솔직히 함께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수로 수조를 깨거나 긁는 것 같은 성가신 일이 늘면 늘지 일을 도울 수는 없었다. 그 말에 사서는 부인하지 않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말상대가 되어 주세요.”

말상대?”

큰 수조라 닦는 데 시간이 꽤 걸려요. 혼자는 심심해요.”

네가 만족할 만한 반응은 못 할걸.”

괜찮아요. 선생님의 그런 대답을 듣고 싶은 거예요.”

 

괴짜라고 생각하면서도 비메이는 펜과 노트를 들고 사서를 따라 뒤뜰로 나왔다. 그러다 손이 새빨개지도록 찬 물에 수조를 닦는 사서를 앞에 두고 자신은 편하게 앉아서 글을 쓰고 있는 상황에 마음이 흔들린 탓에, 차마 일을 돕진 못해도 점차 노트를 덮어두고 사서가 하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게 되었다.

 

비슷한 이유로 인어도 좋아해요.”

그건지금도?”

. 그래서 물고기를 기르는 거니까요.”

 

인어와 물고기는 꽤 다르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사서가 키우는 물고기는 커봤자 손바닥을 넘지 않는 작은 관상어였다.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표정으로 아마 드러난 모양이다.

 

아니라는 생각을 하시나 보네요.”

, 인어도 종류가 많을 테니까. 금붕어 인어라면 그럴지도.”

하하, 그런 작은 인어보다는 사람과 비슷한 크기가 좋지만요.”

 

사서는 그 말 뒤에 이어서 무언가 말했지만 때마침 호스에서 흘러나온 세찬 물소리에 가려져 그것은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비메이가 무슨 말인가 했냐고 묻자 사서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고개를 저으며 빙긋 웃기만 했다.

 

아무 것도요.”

네 지금 표정…….”

제 표정이요?”

장난을 쳤을 때 난키치랑 닮았어. 뭔가 꾸미고 있구나.”

 

사서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비메이도 더는 추궁하지 않았다. 장난이라는 것은 막으려 할수록 몸을 불리는 것이다. 한 번 정도 잠자코 당해주고 타이르면 정도를 가리고 때와 상대를 가리기 시작한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였다.

 

적당히 하도록 해.”

그럼요. 걱정 마세요.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란포를 알면 너도 그 말이 안심되지 않는다는 걸 알잖아.”

하하. 저를 에도가와 선생님이랑 동급으로 보시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비메이는 단호하게 부정하는 대신 눈을 감고 짓궂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아아, 너무해라. 그나저나 슬슬 끝나가요. 먼저 들어가실래요?”

곧 끝나는 거면 마지막까지 있어줄게. 아깝잖아.”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인 사서가 조금 더 센 물로 수조를 헹구기 시작했다. 앉아 있는 발치까지 조금 물이 튀었다. 영하에 가까운 온도에 발이 움츠러들었다. 발목에 튄 물이 비늘처럼 반짝였다. 사서가 아주 잠깐 손을 멈추고 그것을 보고 있었다. 아주 작은 틈이었고, 비메이를 포함해 누구도 알아채기 전에 사서는 수조 헹구기를 마쳤다.

 

고맙습니다.”

아무 것도 안 했는걸.”

그래도 나와 주셨잖아요.”

그래. 어서 들어가자. 손이 다 텄어. 따뜻한 차를 내어줄 테니까 천천히 마셔. 바로 다 마시지 말고.”

 

아직 젖은 수조를 들고 오는 사서보다 앞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 복도 근처에 있던 문호들이 사서에게 모여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 것을 모두 무시하고 곧장 사서실로 향한다.

전기 포트에 물이 얼마나 남았더라, 꽤 담아두긴 했지만 사서가 얼마나 마셨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사서실에 들른 다른 문호들이 마시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고머그컵에 코코아 가루를 넣고 포트를 확인했다. 한 잔 정도는 될 양이라 그대로 한 번 더 끓이는 버튼을 눌렀다.

 

고맙습니다.”

 

가름막 뒤에서 수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왁자지껄한 소란이 이어졌다. 비메이는 돌아보지 않고 포트가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포트가 소리를 내기 전에 끄고, 끓는 물을 붓고 익숙한 방식으로 코코아를 젓는 동안 사서가 부엌 공간 쪽으로 다가왔다.

 

날도 추운데 도와주시고차 좀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뒤를 돌아본 채로 들어오던 사서는 아래를 보며 코코아를 들고 나가던 비메이와 부딪혔다.

 

.”

 

뛰어오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컵이 날아가지는 않았지만 사서와 부딪히며 손을 놓친 탓에 머그컵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비메이는 어쩐지 천천히 진행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마룻바닥에 머그컵이 굴렀다. 얼마 전에 큰맘 먹고 좋은 걸로 바꿨다더니 정말인지 컵은 깨지지 않고 멀쩡했다. 다행이다, 조각 치울 일은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컵을 주우려 몸을 굽혔다. , 코코아 아까워.

 

!”

무슨 일이야?!”

 

왜 사서가 비명을 지르는 걸까? 그 소리를 듣고 가름막 너머의 문호들이 달려왔다. 코타로와 로한이었다. 두 사람은 급하게 비명을 지른 사서를 보고, 바닥에 떨어진 머그컵을 보고, 비메이를 보았다.

 

이런……!”

괜찮나?”

무슨 일이야?”

 

자신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자 조금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사서도 두 문호도 설명해줄 기색은 없어 보였다. 짧은 침묵 속에 코타로가 비메이 앞으로 걸어와 그를 안아들었다.

 

, 뭐야?!”

아까부터 계속 멍한데 괜찮아? 아프지 않고?”

 

무엇이? 그 말에 비메이는 공중에 뜬 자신의 몸을 보았다. , 다리에 코코아가 튀었구나. 튄 정도가 아니다. 떨어지면서 컵을 떠난 코코아가 전부 다리에 끼얹어졌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액체는 거의 흘러내려 여전히 다리에 묻어 있진 않았지만 화상을 입은 게 분명해 보였다.

그걸 보고 비메이는 사서를 돌아보았다. 마주보고 있었으니 그쪽으로도 튀었을지 모른다. 비메이의 시선을 알아챈 로한도 사서의 다리를 기웃거렸다.

 

, 저는 괜찮아요. 이쪽으론 얼마 튀지 않았고, 저는 또 바지도 길어서…….”

그나마 다행이네.”

 

코타로는 비메이를 곧장 보수실로 데려가려 했지만 사서가 말렸다. 우선은 찬물에 담가두고 있어야 한다면서 아까 씻은 것보다 조금 작은 수조를 소파 다리께에 놓았다. 그러는 동안 로한이 오가이를 불러오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소파에 비메이를 앉히고, 신발을 벗겨 다리를 수조에 담그고, 싱크대 수도꼭지에 호스를 달아 수조를 향해 놓고 물을 틀었다.

 

이상하다. 이쪽 다리는 하나도 안 차가워.”

뜨거운 것도 못 느끼던데, 괜찮은 거야?”

다른 덴 괜찮지만 다리는 명백히 안 괜찮을 거예요.”

 

왕진 가방을 든 오가이와 로한이 돌아왔다. 사서가 소파 쪽으로 안내하자 약과 붕대를 가방에서 꺼내고 수조 속의 다리를 보기 시작했다.

 

꽤 큰 화상이군.”

막 끓인 코코아를 떨어뜨리는 바람에…….”

그것뿐만 아니라 심도 녹았어요.”

?”

 

사서의 설명으로는 문호들의 몸은 거의 인간에 흡사하지만 몸 내부로 갈수록 무생물에 가깝다고 했다. 특히 문호들의 본체는 책으로, 몸 밖에 있기는 하지만 연결되어 있어서 몸의 본질은 종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보통 끓는 물을 엎은 건 종이의 한계를 넘은 거잖아요. 신경까지 순식간에 녹으면 통증도 못 느끼게 되는 것처럼.”

그럼 오가와 군의 다리는 녹은 건가?”

, 몸에 붙어 있는 건 인체니까 화상을 입은 정도로만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녹은 거예요. 아무 것도 못 느끼는 건 그래서고요. 새로 제본해서 본체를 고칠 때까지는 몸 부분만 나아도 쓸 수 없어요.”

그거 야단났네. 나을 때까지 오래 걸려?”

마침 여분 종이가 있으니까사흘 안으로 될 거예요. 몸 부분은 보통 화상이 치료되는 정도랑 비슷하고, 모리 선생님이 계시니까 그 부분은 걱정이 없어요.”

 

사서와 다른 두 문호의 도움을 받아 오가이는 찬물로 식힌 비메이의 다리에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약을 바르는 느낌도, 붕대의 압박감도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조수도 그만둬야겠네.”

아아…….”

 

설명하는 동안은 눈을 빛내던 사서가 머리를 감싸고 신음했다. 그러고 보면 사서는 비메이를 꽤 마음에 들어 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죄송해요제가 부주의해서…….”

실제 인간하고 다르게 아예 새로 쓰는 게 가능한 기관인 거잖아. 네가 다친 것보단 낫지. 아프지도 않았고.”

그래도요…….”

사서 씨가 노력하면 금방 나을 거야. 그러면 또 조수가 될 수도 있고. 그렇지, 비메이 군?”

 

코타로의 격려에 비메이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역시도 이러니저러니 해도 특별조수로 지내는 시간에 꽤 익숙해져 있었다. 이 사서실에서 수조를 보는 것도 제법 즐거운 일이었다.

 

그래. 다 나으면.”

정말이죠?!”

그래, 그래. 다친 건 난데 왜 네가 울어.”

 

사서는 비메이의 무릎에 머리를 묻고 울다가 그 말을 듣고 벌떡 일어나 사서실 바닥에 여전히 떨어져 있는 머그컵을 싱크대에 올려놓고 책장과 서랍을 뒤적거렸다. 곧 한 서랍 안에서 깨끗한 종이 한 묶음을 꺼냈다.

 

그게 보수의 재료구나.”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 신기하군. 조금 자세히 보여줄 수 있겠나?”

, 한 장 정도는……. 다리를 만드는 데는 세 장이었나?”

 

사서는 넉넉잡아 다섯 장의 종이를 꺼내고 그 중 두 장을 아직 이 곳에 모여 있는 문호들에게 건넸다. 나머지 세 장은 사서실 한 구석에 있는 재단기에 넣었다.

 

보통 종이랑 크게 다를 건 모르겠네.”

훨씬 희고 질이 좋은 것 같아. 그리고 조금 얇은가? 그림을 그리긴 적당하지 않을 것 같고.”

이런 종이는 어떻게 만드는 거지?”

한 장진료표로 써 봐도 문제는 없나?”

만드는 법은 영업비밀이에요. 문제는 없을 거예요. 그 두 장은 그냥 드릴게요. 종이, 다 쓰시고 버릴 땐 태우셔야 해요. 그림은 액자에 넣으시려나그러면 괜찮을 것 같네.”

 

작두를 당겨 종이를 썰며 빠르게 말한 사서가 고개를 까닥였다. 로한과 비메이는 종이를 갖고 싶은 정도는 아녔기 때문에 코타로와 오가이가 한 장씩 갖게 되었다. 그림을 그리기엔 적당하지 않다고 한 것과 다르게 역시 시험해보고 싶긴 한 모양이다.

종이를 자른 사서가 비메이의 책을 가지러 나가자 다른 문호들도 따라 나섰다. 오가이는 비메이가 앉은 소파에 연고와 여분의 붕대를 두고 나갔다.

 

그러면 비메이 군, 몸조심해.”

쾌차를 비네.”

무슨 일이 있으면 보수실로 오도록 하고.”

, 고마워. 신경 쓰게 해서 미안했어.”

 

어른들도 있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손만 흔들어 인사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서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온갖 일이 있어서 지치고 긴장도 풀린 탓인지 비메이는 그대로 앉은 채 잠들어 버렸다.

 

 

사각사각하고 소리가 났다. 감각이 남은 한쪽 다리가 꽤 차가웠다. 눈을 뜨자 사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몸에는 담요가 덮여 있다기보다 등 뒤까지 둘둘 말려 있었다.

 

, 더 주무셔도 되는데.”

흐암…… 됐어, 낮잠은 길면 몸에 안 좋아. 뭘 하는 거야?”

새로 쓰고 있어요.”

 

사서는 자신의 무릎을 툭툭 쳤다. 그곳에는 비메이의 본체인 책과 아까 재단한 종이가 있었다. 사서에게 받아 책을 펼치자 정말로 몇 페이지 정도가 색이 변하고 쭈글쭈글하게 녹아 있었다. 신기하게도 다른 페이지에는 전혀 영향이 없었다.

사서는 무릎에 책받침을 놓고 아까 그 종이에 무슨 글인가를 적고 있었다. 글씨에 장식성이 많아서 뭐라고 쓰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한자가 몇 개 보였지만 전부 일본어인 것도 아닐 것이다. 이것도 영업비밀이겠지. 물어봤자 대답해주지 않을 거고 대답해 준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쓰는 데 얼마나 걸려?”

쓰고 다시 제본하는 건 오늘 안에 끝나요. 그게 선생님과 이어지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편이죠. , 이렇게 말하면 이해하기 어려운가? 그러니까 적응하는 시간이요.”

그건…… 내가 노력해야겠네.”

그래도 덕분에 생각보다 빨리 할 수 있겠어요.”

 

종이에 온갖 식을 쓰는 사서의 얼굴은 어쩐지 상기되어 보였다. 학자라는 이들은 자기 분야에 대해선 아무래도 이런 편인 걸까. 하긴 문호들도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식당 한복판에서 대규모 패싸움이 난다. 더구나 연금술은 생명의 금기와 기술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가르는 학문이다. 자부심을 덧붙여 이런 마음으로 임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선생님.”

?”

붉은 양초와 인어, 읽어주세요.”

? 다른 얘기 들으면서 쓸 수 있어?”

조금 섞여도 괜찮아요. 선생님을 만드는 거니까요.”

 

비메이는 담요 밑의 발을 수조에 흔들었다.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시간이 지나 냉기가 가셔서인지 그냥 몸이 찬물에 익숙해졌을 뿐인지 아까처럼 차갑지는 않았다.

직접 쓴 글이기 때문인지 눈을 감고도 읊을 수 있었다. 그건 사서가 말한 대로 그를 만들 때 그 문장들이 섞였기 때문일까.

 

저 인어를 좋아해요.”

 

그것은 처음 비메이를 맞이했을 때도, 그를 조수로 임명한 이유를 물었을 때도 사서가 한 말이었다. 만약 이 도서관에 안데르센이 있었다면 몇 년간 조수를 맡은 것도 그였을까?

 

알고 있어. 금붕어 인어 말이지.”

 

사서는 미소만 짓고 대답하지 않았다. 식을 쓰는 손에는 속도가 더해졌다. 얇고 매끈한 종이에 빼곡히 글자인지 장식인지 모를 것이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손을 녹일 코코아가 생각났다. 실내에 있으니 많이 나아졌겠지만 마디가 여전히 흐릿하게 붉었다. 글을 쓰는 손을 방해할 수는 없지만 손을 뻗어 왼손에 포갰다.

 

미안해.”

무슨 말씀이세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새옹지마라고도 하고, 전화위복이라고도 하잖아요.”

 

위로라지만 이걸 계기로 나아질 일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 샘플 데이터 같은 게 추가되려나.

 

선생님이 손도 잡아 주시고 말이에요.”

……좋은 건가?”

좋은 거예요!”

 

본인이 좋다면 좋은 거겠지. 사서는 곧 종이를 전부 채우고 비메이에게 책을 받아 일어났다. 책을 뜯어 망가진 페이지를 빼내고 새로운 페이지를 넣는 작업은 저녁 식사 후로 미뤘다.

사서의 도움으로 겨우 식당까지 간 후에 걱정하는 친구들과 선생님들에게 둘러싸여 식사를 했다. 어찌어찌 대꾸하며 식당을 나서 사서실로 돌아오고 나자 또 곧바로 지쳐 잠들었다.

 

 

기침이 나서 잠이 얕게 깼다. 어쩐지 목이 탄다. 여기가 어디였지, 아마 사서실 소파에서 그대로 잠들었던 모양이다. 몇 년 째 조수였으니 익숙한 대로 굴어버린 것이리라.

비몽사몽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미끄러졌다. 다리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은 탓이다. 새 다리에 아직 적응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손바닥으로 짚은 바닥이 차갑고 딱딱해 소파 위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일어서는 건 못하더라도 엎드린 자세가 몸에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소파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 다시 졸음이 몰려와 차갑고 젖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그 바람에 어느 정도 잠이 깨고 정신이 들고 말았다. 젖은 손……

……어디에서 자고 있던 거지?

 

선생님.”

, …….”

 

흐릿한 불이 켜진 책상 앞에 앉아있던 사서가 일어나 다가왔다. 아마 제본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소리를 듣고 비메이가 깬 걸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왜 이렇게 떨고 있는지 모른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망가져서 새로 쓴 다리뿐만 아니라, 멀쩡한 반대쪽 다리도. 마치 둘이 묶여있는 것처럼더 정확히는 하나로 붙은 것처럼, 그러니까 마치 꼬리처럼…….

 

그렇게 무서워하지 마세요.”

 

사서가 손을 뻗어 그를 들어올렸다. 수조에서, 들어올렸다. 수조와 바닥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 아아비메이는 덜덜 떨며 흠뻑 젖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시야를 완전히 덮어 버리기 전에, 손가락 사이로 인간의 몸에는 절대 없을 무언가가 약한 빛을 반사했다.

 

금방 익숙해지실 거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

 

쥐어짜낸 목소리가 간신히 대답했다. 두 다리를 잃고 그 자리에 붉은 비늘로 덮인 꼬리가 생긴 것도, 이전의 몇 배나 되는 수분을 요구하는 몸이 된 것도, 긴 시간 동안 물속에 있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게 된 것도, 무엇 하나 금방 익숙해질 수 없겠지만 사서는 자신이 하는 그 말이 진실인 것처럼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무엇이 사서가 말한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인지 알았다. 새 식을 쓰던 사서가 왜 그렇게 즐거운 것처럼 보였는지, 무엇을 생각보다 빨리 할 수 있었는지 이제서야 알았다. 새 종이에 식을 쓰는 사서가 다리를 쓴다고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중력을 따라 흔들리는 꼬리지느러미가 소매를 적신다. 흐느끼는 울음은 셔츠 목에 자국을 남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이 밤이 지나기 전에 지워질 것이었다. 그의 몸에 남은 비늘과 지느러미와 아가미와 다르게, 옅푸른 그 흔적은 자연스럽게 말라 세상 어디에도 없던 것처럼 흩어질 수 있었다.

 

금방 마음에 들게 될 거예요.”

 

그 울음 전부를 무시하고 사서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어르듯, 두 팔로 안은 비메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요람처럼, 모빌처럼. 미명이 밝고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고 진주가 되지 않는 눈물을 쉬지 않고 흘릴, 지금 이 순간 온 세상에서 가장 어린 인어를 얕은 파도처럼 흔들었다.

 

 

 

人魚押花栞.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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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문호와 알케미스트 짓는 이의 윤창(카논) 감상

零/弐2020. 9. 19. 19:51

좋은 저녁입니다. 쓴다고 하면서 미뤄두다 드디어 직시할 마음이 들었습니다. 직시할 수 있나? 하지만 해보겠습니다.

 

일본에서 지내고 계신 지인분의 도움으로 e+ 스트리밍을 결제해서 봤습니다. 압도적 감사저녁시간이라고는 해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는 게 정말 행복한 기억이었습니다.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당연하지만 이하의 내용에는 무대 문호와 알케미스트 짓는 이의 윤창(카논)’ (이하 분게키3)의 스포일러가 뒤죽박죽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모가 맛이 가서 기억이 죄다 엉망진창이에요.



무대 문호와 알케미스트 이단자의 원무(왈츠) 감상

零/弐2020. 7. 27. 13:59

일단 여태 이걸 봐서 알고 계시던 분들 부럽다

 

d 아니메 스토어에 풀렸다기에 페이팔과 vpn의 도움을 받아 정말 다양하게 과정을 거쳐 봤습니다. 이걸 쓰다 보니 페이팔 취소 과정이 애매하게 되어 있던 거 생각나네 이의신청하고 올게요. (했습니다)

 

1에 대한 기억이 좀 흐려진 데다 원체 기억력이 나빠서 기록해두지 않으면 아주 메인인 부분 말고는 금방 잊어버리고 말아서 감상이 두서없을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하의 내용에는 무대 문호와 알케미스트 이단자의 원무(왈츠)’ (이하 분게키2)의 스포일러가 드문드문 띄엄띄엄 포함되어 있습니다!!!



켄지와 영화

零/壱2020. 6. 20. 16:53

사서 씨, 부탁이 있어.”

 

켄지가 그렇게 말하며 치마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어쩐지 작은 목소리라 둘러보니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친구 두 사람이 소곤거리고 있다.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숨을 곳을 내어달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슨 부탁인데요?”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켄지는 화들짝 놀라며 난키치와 비메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두 문호는 이 방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이 끝나면, 나랑 영화를 보러 가줘.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

 

빠른 말로 종알거리며 작은 손이 급하게 주머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숨바꼭질은 아니었는지 그새 켄지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두 친구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맑은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난키치! 미메이!”

찾아다녔어! 왜 숨어 있던 거야?”

숨바꼭질을 하던 것도 아닌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사이좋은 세 사람은 사서에게 한번 손을 흔들거나 고개를 숙이고 중정 쪽으로 멀어져갔다. 마주 손을 흔들고 주머니에 든 것을 확인하려 고개를 숙였을 때 눈이 마주친 켄지는 검지를 세워 입가에 대고 입술만 움직여 작게 속삭였다. 비밀이야. 멀어지는 와중에도 부탁이라니 무슨 소리냐고 묻는 비메이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려오고 있었다.

 

비밀이라고 하니 아무리 빈 복도라도 꺼내는 것은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손만 주머니에서 빼고 아무 일도 없을 때 향하는 사서실로 조금 서둘러 걸었다. 오늘의 조수인 쿄시는 헤키고토와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조금 더 선호해 사서실은 비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평소엔 조수가 할 일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라 크게 상관은 없었다.

커튼을 치고 책상에 앉아 책 더미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든 것을 꺼냈다. 바스락거리는 손바닥만한 종이. 반으로 접은 영화표 두 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영화를 보자고 했지.”

 

켄지는 도서관에서 친구가 많은 편이다. 코타로나 타쿠보쿠, 비메이와 난키치, 츄야와 신페이. 함께 가자고 하면 영화를 보러 가줄 문호는 얼마든지 있을 텐데도 비밀이라며 사서를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까.

아야나는 표를 펼쳤다. 시간은 오늘 밤 아홉 시 정도. 나란히 앉은 자리의 표였다. 상대가 문호 선생님만 아니었다면 데이트라고 기대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느라 제목은 제일 늦게 확인했다. 은하철도의 밤.

 

, ? 그러고 보니 재상영을 한다고 들은 것도 같지만…….”

 

덜컹거리는 소리에 후다닥 표를 도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수첩을 든 쿄시가 돌아오고 있었다. 드물게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업무 외엔 붙이지 않던 말을 친근하게 건네기도 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 건가? 상담 정도는 해줄 수 있어.”

 

말할 수 없는 종류의 그것이다. 당황해서 빨개진 얼굴을 이리저리 젓자 쿄시는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연문을 퇴고해 줄 수도 있지.”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에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큰 오해를 작정하고 풀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퇴근 시간과 영화 시간이 동시에 다가오고 있었다. 사서실 앞에 작은 발소리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기로 한 쿄시가 여전히 드문 표정으로 물러나는 것과 함께 문을 열었다.

 

켄지 선생님.”

사서 씨!”

 

뒷정리는 조수의 일이다. 어차피 힘든 일도 없으니 어떤 조수도 이것을 거부한 적은 없다. 다만 만약 데리러 온 문호가 켄지가 아니었다면 쿄시는 쓰지도 않은 연문의 주인공이 그일 것이라 착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손에서 조금 땀이 났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 나도 방금 왔어. 사서 씨야말로 내가 너무 재촉한 건 아니지?”

요즘은 그렇게 서두를 일이 없으니까 괜찮아요. 그렇지, 영화를 보러 가기 전에 식사부터 하실래요?”

 

사서 씨가 아는 식당엔 갈 자신이 없는데. 그렇게 말하며 켄지는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긴 부츠를 신은 발끝으로 먼지를 차듯 흔들었다.

고기나 생선을 쓰지 않는 요리가 있는 식당은 알지 못했다. 아차, 하고 입가에 손을 올리고 놀라자 아이의 얼굴을 한 문호가 본래 나이처럼 후후 웃었다.

 

농담이야. 아까 난키치랑 미메이랑 먹고 나왔거든, 애플파이.”

그렇구나. 다행이에요. 그럼 팝콘 하나만 사서 들어가요.”

사서 씨, 배가 고프구나.”

 

그것보다는 입이 심심해서 그렇다고 말하자니 어째서인지 변명 같아 그만두었다. 아야나가 팝콘을 사며 상영관을 확인하는 동안 켄지는 영화관을 한 바퀴 걸어 둘러보았다. 작은 보폭으로 넓이를 가늠하는 듯 걷다가, 큰 소리가 나지 않게 폴짝 뛰어보기도 했다.

팝콘과 함께 사이다 두 잔을 가져오자 손을 뻗어 대신 팝콘을 들어 주었다. 한참 나이가 많은 사람인 것을 아는데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어쩐지 기특한 동생 같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 마음을 알아챈 것인지 이쪽을 보며 웃는 소년의 얼굴엔 어디에도 아이의 모습이 남아있지 않았다.

상영 시작을 알리는 벨이 울리고 주변이 온통 어두워졌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도 켄지는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크레딧이 전부 올라가고 음악이 끝났다. 영화관 안에도 불이 전부 켜졌다. 이 상영관에 더는 일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앉아 있어도 직원이 들어와 채근하지 않았다.

아야나는 이미 익숙한 결말을 곱씹어보면서 고개를 돌렸다. 이 영화의 각본은 그가 아니지만 기본이 되는 동화를 쓴 것은 켄지이다. 원작자로서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작가가 아닌 그녀로서는 좀체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물론 상상은 할 수 있다. 그녀였다면 지금쯤 기뻐서 상영관을 한 바퀴 돌고 있을 것이었다. 켄지도 다소 그런 인상이었기 때문에 아무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조금 의외의 반응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자 옆자리에는 미소를 지은 소년이 앉아있다. 보석 같은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감독의 해석이 그가 의도한 것을 크게 해치기라도 했단 말일까? 캐릭터가 고양이였던 게 별로인가? 그래도 귀여운데. 생각을 계속하다보니 주제가 흐려진다. 다행히 이 뒤죽박죽인 사고가 영화관에 항의하자는 쪽으로 이어지기 전에 켄지가 입을 열었다. 가볍게 떨리고 있었지만 메이지는 않았다.

 

, 살아서는 책을 내지 못했어. 자비출판으로 낸 게 전부야. 그마저도 많이 읽어주지 않았어거의 내가 회수해서 지인에게 나눠주었을 뿐이니까.”

 

그 말을 들으니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이미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본인(같은 것)에게 듣는 것은 무게가 전혀 다르다. 입안이 바싹 말랐다.

 

하지만 이렇게 되었구나. 내 책은 영화가 되었어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봐주게 되었어. 내 이야기는 사랑받게 되었구나나는 사랑받는 작가가 된 거구나.”

 

믿고 있었어, 같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아야나는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그의 작품을 아주 좋아했다. 어려서 수도 없이 읽은 책이다. 그 하나만으로 진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그녀의 인생에 길을 그은 작품이다. 선생님의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고, 수많은 이들이 그렇다고 말하고 싶었다.

 

저는, 선생님을 질투했어요.”

 

그러니 이런 말이 나온 것은 절대 예상한 것이 아니다. 눈물이 옮았기 때문이다. 자신에 입에서 나온 말을 어쩌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리다가, 무의식처럼 말을 이었다.

 

저는 글을 잘 쓰지 못해요. 선생님도 읽은 적 있으실 거예요. 제 관찰력의 한계예요. 감성의 패배예요. 상상력의 죽음이에요. 앞으로도 그럴듯한 글은, 시는 쓰지 못할 거예요. 저의 능력의 부족이니까요. 하지만 어렸을 때 저는, 그걸, 제 슬픔의 결여가 원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행복하게 살았으니까요, 글에 목마르지 않았으니까요.”

 

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정말로 아야나는 이런 얘기를 할 생각이 없었다. 굴곡이 없는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부끄러운 기억을, 어째서 본인에게 얘기하게 된 거지?

 

그래서 저는선생님의 문학 맨 밑바닥에 있는 슬픔을 질투했어요. 저에게도 슬픔이 있다면 글을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착각을 했어요……!”

 

뭉개지는 말은 울음이 되어 마지막에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어요, 그런 게 아니었어요, 울음 속에서 흩어지는 말들을 그가 어떻게 알아들어 주었는지 모르겠다.

 

울지 마, 사서 씨.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려고 쓴 건 아니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서 씨가 잘못한 건 아니야.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수십 번 질투했을 거야. 알 수 있어. 내가 가지지 못한 다른 요인 때문에 내 글이 읽히지 않는 거라고.”

 

병이 그 아이를 데려가 버렸기 때문이라고.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은 그저 눈물이 옮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인공을 닮은 작가는 손을 뻗어 문학소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마저 흐르지 못한 눈물이 별빛처럼 아래로 떨어졌다.

그저 그의 글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의 인생을 만들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읽고 살아가고 있다고, 밤하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선생님의 상실을 후벼팔 생각은 없었어요…….”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구나 슬픔을 가지고 살잖아. 사서 씨는 그걸로 글을 쓰지 못해도, 누구보다 훌륭한 독자야. 작가에게 그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

 

그의 마지막 눈물이 깜빡임과 함께 스며 사라졌다. 입가에 지은 미소는 익숙한 소년의 것이다. 동시에 사랑받은 아이 같기도 하고 아이를 자랑하는 부모 같기도 한……

아야나를 달래기 위해 켄지는 짧은 노래를 시작했다. 별 순회의 노래다. , 이것도 알고 있다.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그치며 아야나는 문득 생각한다. 연문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쿄시가 퇴고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투른 감정을 그대로 써두는 쪽이 나은 편지일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 켄지가 아니다. 물론 작가로서의 그를 사랑하지만, 연문을 보낼 상대로서는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 쓰는 편지는 그에게 도착할 것이다.

사과의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 편한 말로 하면 그것은 감상문이다. 켄지의 글에 대한 고백을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 내용이라는 점에선 어쩌면 유언장을 더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아야나는 손을 뻗어 자신을 달래는 켄지의 손을 잡았다.

 

이제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면서도 아야나가 그렇게 말하자 정말이냐고는 묻지 않는다. 손을 잡은 채로 의자에서 일어나 어두운 상영관 속을 길잡이별처럼 이끌었다.

어떻게 이런 사람의 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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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론 소다 이하토브

零/壱2020. 6. 20. 16:23

눈을 깜빡인다.

흐릿하게 뜬 시야로 인영이 있다. 몸을 돌리고 어딘가를 바라보는 것처럼 멈추어 있다.

눈을 비비고 기지개를 켜자 맞은편의 사람 쪽에서 알아챘는지 자신을 불러 왔다.

 

츄야 군, 깼구나.”

 

부드럽고 곱실거리는 금발이 이쪽으로 기울어진다. 평소에는 웃음을 담뿍 담은 토끼풀 색 눈은 담담하고 침착한 빛을 띠고 이쪽을 향하고 있다.

경애해 마지않는 선생의 드문 얼굴을 보고 몸을 바로잡아 일으켰다. 어쩐지 우수에 찬 눈은 사이다 병에 비친 밤하늘을 닮았다. 가느다란 두 다리를 노래처럼 흔들며 앉은 그는 창밖을 보고 있다.

 

수도 없이 읽은 책 속의 장면이다. 가장 존경하는 작가의 유고로 발견된 원고에서살아서 낼 수 없던 책의 단편이다.

 

선생님, 이건……

, 하지만 걱정하지 마. 꿈이니까. 나는 중간에 너를 혼자 두고 내리지 않아. 열차와 함께 이하토브까지 갈 거야.”

 

그를 따라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열차는 달리고 있지 않다. 애초에 지금 있는 곳이 열차 안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전구 하나로 밝힌 어스레한 실내에서 보이는 창밖은 호수처럼 펼쳐진 밤하늘이었다.

 

분명 츄야 군도 아주 마음에 들어 할 거야.”

 

그것을 보물처럼 말하는 소년은 오라비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끼는 것을 내어놓듯 상냥한 목소리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그 눈에는 동시에 슬픔이 가득……

 

분명 아주 마음에 들 거야.”

 

그럼에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소년은 다시금 말한다. 손을 뻗어 맞잡고, 쥐고 있던 무언가를 이 손에 넘겨주었다. 손을 펴면 그 안에는 차갑고 동그란 유리구슬이 있다.

우주를 사랑한 동화작가의 이상향을 굳혀놓은 것 같은 물건이었다. 작고 투명한 우주본이 체온에 데워져 가고 있었다.

 

, 선생님 말씀대로야.”

 

손에 든 구슬을 이리저리 굴리다 삼켰다. 마주 앉은 이도 놀라는 기색 없이 그제야 소년답게 미소 지었다.

 

선생님의 이하토브가 어떨지 아주 기대되는걸.”

 

삼킨 구슬은 메론 소다의 맛이 났다. 덜 녹은 아이스크림 같기도 했다. 차갑게 녹는 꿈속에서 달리지 않는 열차는 고래 울음소리를 닮은 기적을 울렸다.

 

정말 고마워.”

 

우주가 스며 다시 눈을 감았다. 도착하거든 깨워줄게, 그 목소리에서는 사과의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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