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없는 편지

零/壱2022. 6. 7. 01:05

2020년에 통판한 문호와 알케미스트 게스트북 「제국도서관 회고록」에 참가한 작품입니다. 허락 받고 공개해요!

뭔가 후기로도 주절주절했는데 그것까지 올리긴 그렇고… 폰트 차이를 넣는 것도 웹으로는 생략되겠네요. 책이 있으시다면 그쪽을 잘 부탁드립니다.

창작 사서 설정이 은근슬쩍 등장합니다. 이름은 안 나오고 그렇게 중요하진 않아요.

어설픈 호러라 사실 그렇게 무섭지는 않겠지만 무서울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무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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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는 사람들이란 필연적으로 시야가 넓기 마련이다. 관찰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것을 쓸 수 없다. 집중하지 않아도 될 때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게 되는 것도 그것으로 인한 버릇이다.

그러니 눈 내리는 날 장에서 과일과 간식거리를 한 아름 들고 돌아오는 길에 나카노와 호리가 그것을 발견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시게지, 이것 좀 봐.”

 

길가에 있는 전신주에 붙은 전단지를 먼저 발견한 것은 호리였다. 나카노가 아닌 것은 호리 쪽이 더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호리가 무릎을 굽히고 앉아야 글자를 볼 수 있는 위치에 붙은 전단지에는 인쇄한 것이 아니라 붓으로 쓴 글씨가 적혀 있었다.

 

 

소중한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도와주신다면 영혼을 담아 사례하겠습니다.

 

 

무엇을 찾는지는 몇 번을 읽어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 아래는 멀지 않은 곳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전단지였다. 코팅이 되어 있지도 않고, 전화번호가 쓰여 있지도 않았다.

무릎을 거의 꿇다시피 앉아서 보고 있다가 나카노는 주소를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간단한 문장을 외울 때 나오는 사소한 버릇이다.

도서관으로 돌아간 그들은 제일 먼저 식당에 과일과 빵을 놓고, 두 개의 사서실에 간식거리를 채워 넣은 후에 종이와 펜을 들고 담화실로 향했다. 몇 명의 문호가 있었지만 그들의 모습이 유별난 것은 아니라 가벼운 인사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식탁 하나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사람은 소곤거리듯 종이를 펼치고 거침없이 편지를 써 내려갔다. 물론 펜을 잡은 것은 호리였다. 나카노가 옆에서 불러주는 것을 바른 글씨로 받아 적었다. 편지의 내용은 간단하다.

 

 

전단지를 보고 연락드립니다.

귀하께서 찾고 계시는 분실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답장은 이 편지를 보낸 주소로 주시면 됩니다.

 

나카노와 호리 씀

 

 

일사천리로 쓴 편지를 봉투에 넣고 주소를 적어 도서관을 나섰다. 도서관에서 삼 년 넘게 생활하면서 모든 문호는 소리 내지 않고 빠르게 걷는 법을 알았다. 이 도서관에 가장 먼저 불려온 그들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가까운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나서는 느긋하게 돌아왔다. 도서관에 들어오기 전, 나카노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지?”

 

호리는 그것에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고 둥근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거야.”

 

도서관의 사람 중 크게 나쁜 감정을 가진 상대는 없지만, 이 일을 알게 되면 다소 곤란한 사람들은 있었다. 활을 쏘는 모임은 절대 이 화제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집요하게 파고들게 되면 일상은 소재가 되고 그건 자극이 된다. 이야기가 그렇게 숨이 멎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들이 나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이 도서관에 모인 이들은 정부 직원을 제외하면 모두 글을 쓰는 이들이다.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에 매달리는 것은 모두의 직업병이다. 나카노와 호리도 당사자가 아니었으면 궁금해했을 이야기이다. 모든 게 해결되고 나서 펜을 잡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하지만 일단은 그것을 최대한 미뤄둔다. 이것이 두 사람의 일상에 대한 예의이다. 상대가 잃어버린 것을 찾거나 아주 포기할 때까지, 이것은 이야기의 소재가 아니라 누군가의 삶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되었다.

그걸 말한다고 이해해주지 않을 사람들인 것은 또 아니지만 결국 이것은 그들 자신에 대한 경계이다. 소문으로 흐름이 만들어지면 그것에 휘말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아무리 해도 그들은 결국 작가였으니까.

 

그러나 그들의 결심도 무색하게, 결과적으로 도서관에 그들의 비밀은 알려지고 말았다. 그것도 하루만의 일이다.

나카노는 발치를 맴도는 고양이를 내리깐 눈으로 한참 쳐다보았다. 호리는 그런 나카노의 표정을 살피다가 고개를 돌렸다. 맞은편 테이블에 앉은 사서가 긴장 때문인지 굳은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편지 봉투가 하나 있었다.

 

선생님들의 안전을 위한 거예요.”

하지만 검열이야.”

내용은 보지 않았어요!”

저어, 그러면 안전을 논할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아직은 먈이지.”

 

고양이가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로 뛰어올랐다. 나카노는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할 것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웬만한 일은 다소 융통성 있게 넘어가는 알케미스트들과 달리 이 고양이는 지나치게 엄격하다. 그들이 빠뜨린 공무원의 미덕을 죄다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앞발을 들어 편지를 눌렀다. 한참 아무 말이 없다가 사서를 돌아보고 말했다.

 

뒤집어댜오.”

, !”

 

사서가 후다닥 편지를 뒤집었다. 뒤집은 면에는 편지 봉투에 당연히 실리는 정보가 적혀 있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 고양이는 앞발을 받는 사람에 올렸다.

 

도서관 외부와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금지되지 않았을 텐데.”

……아주 위험햔 일이다.”

……처음 듣는걸.”

 

그때부터는 고양이와 나카노의 설전이었다. 일단 그 둘을 소환한 건 사서였고, 호리 역시 같은 이유로 불려왔으나 둘이 말로 치고받고 하는 동안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서는 테이블에서 벗어나 호리의 옆에 앉아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둘을 번갈아 보았다.

 

당장 끝날 것 같지 않네요.”

말려야 할까요?”

그것보다저렇게 말하면 목이 마를 테니까 차라도 끓이는 게 어떨까요?”

 

조수 경험이 많은 호리가 익숙하게 차를 끓이러 간 동안 사서는 혼자 둘을 말려보려 애썼다. 표현의 자유, 국가 기밀, 파업이며 태업이며 온갖 말이 오가는 탓에 금방 그만두고 말았지만.

 

그래서 저게 무슨 편지인지나 알고 하는 말이야?”

모른댜. 내가 뜯어보면 정말로 검열이니까.”

 

소리 없이 테이블 위에 찻잔이 놓이고 나카노는 거칠게 고양이가 앞발을 걸치고 있는 편지를 낚아채 뜯었다. 그것을 저지하려던 고양이와 실랑이를 하다가 고양이가 찻잔들을 치는 바람에 차가 쏟아지고, 네 목소리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분실물을 찾아주겠다는 편지일 뿐이니까!”

뭐 하는 거냐, 편지를 내놔랴!”

, 아야, 아뜨뜨뜨…….”

탓쨩 선생님!”

 

뒤이어 요란하게 잔 깨지는 소리가 나자 말싸움이 멈췄다. 차를 내려놓다가 그대로 날아오는 찻물을 맞은 호리가 팔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고양이도 나카노도 놀란 표정을 짓고는 그 주변으로 달려갔다.

 

타츠, 괜찮아?!”

잉크 가져왔어요!”

무슨 일인 거냐?!”

 

사서가 원고지를 펴고 수복식을 적는 동안 고양이와 나카노는 상황을 파악했다. 다행히 깨진 조각으로 난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다가 나카노가 조각을 치우고 고양이가 수건을 물어오자 호리는 소매를 걷고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이제 다 싸운 거지?”

…… 미안해, 타츠.”

……미얀하게 됐다.”

선생님이 여러 번 개화한 몸이라 그나마 다행이에요…….”

 

사서가 식이 적힌 원고지를 붕대 정도 너비로 찢어 호리의 팔에 감는 동안 나카노는 고양이를 돌아보았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뜯은 편지를 펼쳐 고양이의 앞에 내밀었다. 마시지 못할 차 냄새가 분위기를 조금 가라앉혔다.

 

어제, 분실물을 찾는 전단지를 보고 보낸 편지의 답장일 뿐이야. 도서관 밖으로 편지를 보낸 건 처음이긴 한데, 답장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고……. 애초에 정부는 몰라도 사서에게 폐를 끼칠 생각은 없어.”

정부는 왜 모르는 거냐.”

 

나카노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양이도 그것까지 캐묻진 않고 대신 편지를 훑어보았다. 인쇄한 것이라고 착각할 만큼 가지런한 붓글씨였다.

 

 

나카노 님과 호리 님께

 

두 분의 친절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하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무엇이었을까요. 물건이었을까요, 추억이었을까요, 동물이었을까요, 사람이었을까요.

무엇이든 짚이는 게 있거든 일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른 의미로 위험햔 편지인 것 같은데.”

그만큼 절실해 보이는 것뿐이에요. 직접 대면할 일도 없을 거고,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그리고 다른 문호들에게는 되도록 비밀로…….”

 

분위기가 가라앉은 덕분에, 여태 소란에 가려진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양이와 나카노와 호리와 사서는 그때 사서실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틈에 바싹 붙어 안을 들여다보는 불안한 청색 눈이 시선을 알아채고 뒤로 물러났다.

 

우와앗!”

, 사쿠!”

이런, 들켰네. 다들 안녕.”

 

태평스러운 목소리로 아쿠타가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멋쩍어하면서도 뒤를 이어 무로와 하기와라가 쭈뼛쭈뼛 들어왔다.

 

엿보거나 엿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갑자기 깨지는 소리에 싸우는 것 같은 낌새가 나서.”

, 사서실에서 싸우다가 잘못하면 어쩌나 싶어서 그랬어……. 사서 씨의 만년필이 망가지거나, 유리창이 깨지거나, 그러면아주 슬퍼할 테니까…….”

하기와라 선생님……!”

감격하고 있을 때냐!”

 

사서가 어쨌거나 나카노와 호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문밖에 다른 문호들이 있지는 않았다. 세 사람을 안으로 들이고 문을 닫자 사서가 이번에는 빼놓지 않고 문을 잠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 드릴게요.”

 

그리고 편지 하나로부터 시작된 검열의 의혹과 편지 쟁탈전 중 희생된 찻잔 네 개와 찻주전자 하나, 호리의 팔에 대한 이야기를 사서가 늘어놓았다. 편지에 대한 얘기까지는 아무렇지도 않게 듣던 세 사람은 날아간 찻잔과 마시지 못하게 된 차와 호리의 팔에 대한 얘기를 듣곤 사색이 되었다.

 

탓쨩코, 팔은?”

, 이제 괜찮아요.”

아직 안 괜찮아요. 내일이면 식을 풀어도 되지만 아직은 아니라고요. 하루 정도 무거운 걸 들면 안 돼요.”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에요!”

아니, 중요한 것 같은데.”

중요한 거예요!”

 

그러거나 말거나 호리는 비장하게 말을 이었다.

 

이 일을 다른 분들께는 비밀로 해주세요.”

 

편지의 기원에 대해서 설명하는 동안 사서실에서는 차 냄새가 빠지기 시작했다. 아쿠타가와가 담배를 물었지만 사서가 비명을 지르며 막았기 때문에 불을 붙이진 않았다.

 

그런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지. 걱정 마, 탓쨩코.”

하쿠 씨에게는 하마터면 말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하쿠슈 선생님은 이해해주실 테니까…….”

되도록 비밀로 해주세요.”

 

나카노가 다시 한번 말을 맺자 무로와 하기와라와 아쿠타가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알게 됐지만 거기서 그쳤다. 고양이는 더 이상 이 건에 대한 편지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중간 과정을 생각해보자면 결말은 평화롭게 난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답장이긴 하네. 너희 둘, 귀신에게 홀리거나 한 건 아닐까? 혹시 모르니까 주소로 직접 가보거나 하지는 마.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아주 슬플 테니까.”

아쿠타가와 이 녀석, 그런 불길한 소리나 하고.”

 

사서실 밖으로 나서자마자 담배에 불을 붙이고 그렇게 말하며 아쿠타가와는 사라졌다. 무로의 말에도 느긋한 웃음소리만 복도에서 들려왔을 뿐이다.

 

그 후로 두 사람은 매일 편지를 썼다. 답장이 도착하는 것이 너무 빨라(하루 만에 도착했다) 편지를 가져다주는 사서에게 묻자 대답이 돌아오긴 했다.

 

여긴 수도니까요. 아마 집배원분들이 아주 빠르신 게 아닐까요?”

 

별로 도움은 되지 않았다.

편지의 내용은 별것 아니다. 거리에서 발견한 물건과 도서관에서 나온 분실물의 목록을 세세하게 적어 이 중에 찾는 물건이 있느냐는 편지였다. 그러면 답장은 매번 똑같은 문장으로 도착했다.

 

성의에 감사드리지만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의 편지와 다른 것이라는 것은 매번 손으로 쓴 편지라 글씨가 아주 사소하게 다르다는 것 정도였다. 맥이 빠질 만큼 단순한 반복인데도 두 사람은 지치지 않고 분실물을 찾아 편지를 썼다.

편지를 쓰고 분실물을 찾는 데 하루 온종일을 쓰지는 않았으므로 비는 시간에는 장을 보러 가고 밭을 구경 가고 잠서를 하고 글을 썼다. 원고지에 무심코 기모노와 어울릴 만한 붉은 비단으로 만든 주머니(지갑으로 사용함)’라고 적다가 종이를 구겨 버리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반년이 가도록 원하는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똑같은 문장의 편지가 백 장이 넘게 쌓이자 아무리 두 사람이라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매번 꼬박꼬박 전해오는 편지에 질책이라곤 한 획도 없었음에도 그랬다. 차라리 그랬으면 더욱 불이 붙어 찾는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들은 분실물 찾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본업이 있는 이상 그것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었다. 여태 사서의 배려로 주요 회파에서 제외되어 있던 것도 되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동안 찾은 수백 개의 분실물 중 수십 개는 주인을 찾아 돌아갔고 그 외에는 도서관에 놓여 여전히 주인을 찾고 있거나 처분되었다.

더 이상 분실물을 찾을 수 없다는 편지를 보내고 둘은 사서에게 가 다시 제1회파에 넣어 달라고 부탁했다.

 

찾으신 건가요?”

 

만년필을 들고 회파에 둘의 이름을 적는 사서가 어쩐지 들뜬 목소리로 물어왔다. 기대를 배반하는 것 같아 조금 망설이게 하는 목소리였다.

 

아니, 이대로는 본업에 지장이 갈 테니까 슬슬 그만두려고.”

. 더는 찾을 수 없겠다는 편지도 보냈어요.”

…….”

 

예상대로 사서의 눈썹이 보기 쉽게 처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두 사람이 여태 얼마나 많은 편지를 보냈는지 알았기 때문에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서는 웃으면서 뭔가 얼버무리고는 인사를 하고 담화실을 나갔다.

그리고 몇 분 지나지 않아서 사색이 된 사서가 종이를 쥐고 도로 뛰쳐 들어왔다. 도서관 본관이 아니기 때문에 단속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곤 해도 다급한 발소리 때문에 들어오기 전부터 누군가 뛰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였다.

 

무슨 일이세요? 두고 가신 거라도 있나요?”

, 물 좀 마셔봐.”

 

건네준 물컵을 받아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사서는 사색이 된 얼굴로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았다. 편지 봉투였다.

 

, , , 이거……

이시카와 씨?”

도서관의 책이 담보?”

선생님들한테 온 편지예요! 하지만 오늘 보냈다고 하셨죠? 답장이 이렇게 빨리……?”

 

편지는 오늘 아침에 보냈다. 그것을 떠올리고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편지를 아무리 빨리 배달한다고 해도 이것은 불가능하다. 어쩔 줄 몰라 하던 사서가 고양이를 부르러 뛰쳐나간 사이에 수신인인 두 사람은 굳은 얼굴로 봉투를 뜯었다.

늘 편지를 써 보내오던 질 좋은 종이에, 마찬가지로 가지런한 글씨가 적혀 있다. 붓질 한 번도 허투루 하지 않은 편지는 역시 그 사람이 보낸 것이다.

 

나카노 님과 호리 님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이지만 두 분을 붙잡기엔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대신, 답례라고 하기는 약소하지만, 부디 폐옥あばらや에 두 분을 초대하고자 합니다.

답장은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총총, 쿠치나시口無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두 사람은 현관에서 사서가 건네준 우산을 들고 굳은 표정으로 도서관을 나섰다. 편지의 이야기를 듣고 고양이가 단어 그대로 펄쩍 뛴 것이 떠오른다. 놀란 고양이가 그렇게 우스꽝스러운 꼴이 되는 건 처음 알았다. 고양이는 펄펄 뛰었고, 사서는 걱정스러운 몸짓으로 도서관 안을 온통 돌아다녔지만 어째서인지 불허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랬다. 마치 여름이 그렇게 만든 것처럼.

다른 문호의 눈에 띄어서는 곤란하므로 명목상으로는 사서의 심부름을 가는 것이 되었다. 대신 들러 인사를 드릴 곳이 있다는 설정이라고, 그래도 여태 심부름에 굳이 쫓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마중은 나오지 못한다고. 사서실에서 두 문호를 보내며 사서가 울상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대신 동생인 쪽 사서가 마중 나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바람은 불지 않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어깨를 두드린다. 빗방울이 우산과 발치에 떨어졌다. 어쩐지 무겁기 그지없는 분위기로 말없이 비 오는 거리를 걷다가 문득 도서관을 돌아보면 그 커다란 건물의 대문이 어쩐지 영영 열리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다녀오라고 했으니. 그러다 문득 둘 다 오늘은 연금동의 차림새를 하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지정된 시간 동안 자리를 벗어날 수 없는 일반동의 업무에 비해 연금동은 지정된 횟수의 잠서만 해결한다면 여유로운 편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하다. 언제라도 뒤따라올 수 있도록.

계속 생각하다가 걸음이 늦어진 나카노가 그것을 먼저 알아차렸다. 열 보쯤 앞에서 기다리는 호리에게 다가가 귀엣말로 속삭이자 호리의 얼굴은 향이 번지듯 밝아졌다.

 

잘 됐다! 그렇지, 시게지?”

책 밖이니까 절필할 일도 없을 거야.”

 

애초에 편지를 보낸 이가 한 것은 초대뿐이지만 어째서 절필의 경우를 생각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이 가느다란 감각이 예지였을지도 모른다고 돌이킬 수 있을 것이었기에, 이때 나카노는 자신이 왜 절필을 입에 담았는지 잠깐 생각했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아무튼 간에 분위기가 조금 들뜬 것은 둘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수다스럽지는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는 분위기가 늘 둘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침묵에는 조금 숨이 막힐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리를 잡담으로 헤쳐 나가다가 호리가 걸음을 멈췄다. 이 거리엔 들어선 적이 없다. 그러니 처음 보는 것이 당연한 길이 마치 이경의 것 같았다. 물에 젖어 검게 보이는 돌바닥에 비를 맞아 떨어진 치자꽃이 무늬처럼 흩뿌려 있었다. 빗소리에 섞여 치자 향이 흘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한테 편지를 보낸 사람 이름도 쿠치나시였지.”

? 아아, 그러게. 그래서 여기에 치자를 심어놓은 걸까. 나랑 취향이 맞으면 좋겠는걸. 맞다, 내 문학기를 치자기라고 하는 모양이야. 마침 조만간이기도 하네.”

, …….”

미안. 웃으라고 한 말이었어…….”

 

떨어진 치자꽃을 밟으며 그 수상한 집 앞으로 발을 들였다. 폐옥이라는 표현은 역시 단순한 겸양어일 것이 분명한, 근사한 일본식 저택이었다.

문 앞에는 놋쇠로 된 우편함이 하나 놓여 있었다. 고풍스러운 우편함은 비를 맞아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었다. 미리 거둬간 것인지 남아 있는 우편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 집초인종이 없네.”

 

호리가 그렇게 말해서 나카노도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고 해도 맨손으로 가는 것은 신경 쓰인다고 사서들이 챙겨준 밤 만주 상자가 젖지 않게 고쳐 안고 초인종을 찾아봤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고리를 잡아두드리자 사이를 두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누구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열었다면 꽤 위험한 습관이다. 손님이 그런 것을 타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말하지는 않겠지만. 아마 문 너머에서 밖을 내다보기라도 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래도 지금 찾아온 이 둘은, 악의를 가진 인상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실례하겠습니다.”

호리와 나카노인데요…….”

 

문 근처에 세워둔 빗자루가 있었지만 그것뿐이었다. 호리는 밤 만주 봉투가 젖는 것도 잊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점점 사색이 되어갔다.

 

사람이 없네.”

초인종은 없는데 대문은 최첨단인 걸까.”

 

가능성이 낮은 말이라도 뇌까리며 반들반들한 돌로 놓은 길을 따라 걷자 곧 징검다리가 나왔다. 본채는 커다란 연못 위에 지어 있었다. 연못에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수면을 전부 덮어버릴 정도로 수련이 피어 있었다. 다리가 놓인 곳은 조금 바닥이 높아 야트막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꽤 깊어 보였다. 징검돌 위에도 물이 조금 깔려 있었다.

비가 오고 있었기 때문에 마루에는 빗방울이 조금 튀어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미끄러져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서 현관까지 가자 쇼지가 열리고 후리소데 기모노를 입은 한 사람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릎을 꿇고 앉았는지 긴 검은 머리가 다다미 바닥에 깔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카노 님, 호리 님.”

 

그러더니 엎드려 절을 했다.

 

안녀, 으앗!”

타츠!”

 

그 바람에 놀란 호리는 징검돌에서 미끄러져 연못에 빠질 뻔했다. 나카노가 급히 붙잡아 물에 빠지는 불상사는 막았지만 들고 있던 밤 만주는 봉투째로 날아가 연못 어딘가에 떨어지고 말았다.

사과하는 두 사람에게 주인은 괜찮다는 것처럼 손을 저었다. 표정은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사실 이 집의 주인은 성별도 나이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전등도 없이 촛불만 켜진 방 안이 어두워서 그런지 얼굴은 어쩐지 창백해 보였다. 소매 밖으로 간신히 나온 손가락은 가늘고 길고, 손톱은 손가락 끝까지 바짝 짧은 상태였다.

 

그동안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찾지 못했지만 어쩌면 이것도 운명이겠지요. 누추한 곳이지만 부디 편안히 있다가 가세요.”

 

그리고 다시 절을 했다. 어쩐지 마찬가지로 절을 하면서 두 문호도 인사를 했다.

 

나카노입니다.”

호리입니다. 으으죄송합니다. 선물로 사 온 밤 만주가연못이…….”

괜찮습니다. 오늘은 제가 두 분을 대접하려고 부른 것이니까요. 연못은 걱정하지 마세요. 안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긴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며 지났다. 어째서인지 걸어갈 때마다 후스마는 저절로 열렸다. 몇 개의 방을 지나 가장 안쪽의 방에는 다다미 여섯 칸은 너끈히 차지할 만한 상에,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정말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푸짐한 만찬이 차려져 있었다.

 

마음껏 드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다는 못 먹……? 어때, 시게지?”

타츠…… 아무리 그래도 너랑 둘이서는 좀 많아.”

 

주인은 상석에 두 문호를 앉히고 비가 오고 있지만 밖이 보이도록 쇼지를 열어 문가에 물러서 앉았다. 비가 오고 있어 시시오도시의 소리가 자주 들려왔다. 조용한 식사 시간에 주인이 몇 번인가 말을 건네 왔다.

 

두 분은 펜을 자주 잡으시는 모양이지요. 편지에 쓰인 글자에서 그런 것이 느껴졌어요. 도서관에서 보낸 편지였으니 직원이실까요? 책이 많은 곳에서 살면 그런 교양도 몸에 배는 걸까요?

늘 같은 글자로만 쓰여 있어서 아마 편지를 쓰는 것은 한 분일 거라고 생각했답니다. 다른 한 분의 글씨도 보고 싶었는데 결국 보지 못하게 되어 아쉽네요.”

 

질문이 섞인 말에 대답을 하려 입을 열면 주인은 손을 저으며 두 손으로 상을 가리켰다. 가만히 지켜보는 눈빛에는 부드러운 압력이 깃들어 있어 입을 다물고 젓가락을 고쳐 쥘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에는 주인의 뒤에 놓인 후스마가 조금 열리고 주인이 그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잠깐 짧은 말이 오갈 만한 사이를 두고 주인이 직접 후스마를 닫더니 다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볼일이 있어 자리를 비우게 되었습니다. 오늘 방문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기묘한 초대는 끝나는 인사까지 일반적이지 않았다. 주인이 다시 후스마를 열고 너머로 지나가기 전에 나카노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후에라도 물건은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후스마가 닫히기 전 문틈으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방 안으로 새어 들어왔다.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상석에 앉은 두 사람에게도 분명히 들릴 만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지금 찾았답니다.”

 

.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도 없이 주인이 점차 멀어져갔다. 문을 바라보다가 상으로 고개를 돌리니 아까까지 차려 있던 음식은 온데간데없이 아무 무늬도 없는 접시 위에 석류가 세 개 놓여 있었다.

 

먹지 않는 게 좋겠지.”

석류라니 누가 봐도 수상해. 나가자.”

 

자리에서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고 온 방향대로 따라 나왔다. 다다미만 놓인 바닥이 끝나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바깥으로 이어지는 쇼지를 열어도 보이는 것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연못이다. 심각한 일인데도 이 연못 어딘가에 밤 만주가 가라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 탓에 분위기가 조금 가시고 말았다.

 

안 되겠네. 남의 집이라 이러진 않으려고 했는데. 뛸 수 있겠어?”

너무 오래라면 어렵겠지만그 정도는 괜찮을 거야.”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시게지야말로. 지금 나를 너무 어린애 취급하고 있지 않아?”

 

위기일발의 상황에 나오는 버릇이 들켜 버렸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돌리자 일단 지금 추궁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후스마는 저절로 열렸기 때문에 달리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없었다. 어느 정도 달리다가 지치면 잠시 앉아서 발을 주무르며 쉬고, 다시 달리고를 반복하다 보니 변화가 없는 방에 다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맨바닥에 처음에는 한 알, 다음에는 통째로 하나, , 세 개의 석류.

달리다 밟아 으깨 다다미 틈으로 스며드는 석류의 과즙이 마치 핏물 같았다. 발바닥을 따라 자국으로 남는 흔적이 참극처럼 보였다. 에도가와의 작품에 석류라는 제목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내용과는 관계없겠지만 이 상황 자체는 그가 좋아할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이야기도 무사히 나가고 나서야 할 수 있겠지만.

석류 세 개의 방 끝에는 후스마가 아니라 쇼지가 있었다. 저절로 열리지 않는 그 문을 열기 위해 석류즙이 묻은 손을 뻗었다. 창호지에 손자국이 꽃잎처럼 물들고 종이를 잡아 찢듯 문을 붙들어 열었다.

 

밖이다……!”

쫓아오고 있지는 않지? 서둘러야, 물에 빠지지 않게도 조심하고.”

 

서두르면서 게타를 신고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두 문호가 겨우 신에 발을 꿰었을 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돌아가시나요?”

 

허리를 곧게 펴고 선 집주인이 이쪽을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어쩐지 눈빛을 피하고 있으니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까지만 듣고 나카노는 몸을 일으켜 아직 게타 끈에 발을 걸쳤을 뿐인 호리를 붙잡아 당겼다. 징검다리에서 발이 미끄러지기는 했지만 나카노가 단단히 붙잡은 덕분에 물에 빠지지는 않았다. 한 짝의 게타가 허공을 날아 또 연못 어딘가에 처박히는 소리가 났다.

 

미안해, 우선 뛰자!”

, ! 괜찮아!”

 

빗물이 남은 풀을 밟고 걷는 맨발의 한쪽 발자국은 여전히 석류즙이 짓이겨지고 있다. 넘어진 빗자루를 무시하고 대문에 걸린 빗장을 밀어 올리고 나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아아, 아쉽다. 겨우 적당한 종이 뭉치를 찾았는데.”

 

대문턱을 넘기 직전에 그런 한탄 소리가 들려왔다.

 

 

나와서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다다미에 발이 쓸리고, 손과 발, 옷 끄트머리가 석류즙으로 엉망인 데다 호리는 게타 한 짝마저 잃어버린 채였다. 그러고 보니 우산도 두고 와 버렸다. 비를 맞고 있으니 손이며 발에서 석류즙이 씻겨 누가 보면 오해하기 좋을 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간도 조금 지났는지 하늘은 조금 어두웠다. 지친 나머지 젖는 것도 신경 쓰지 못하고 빗속에 멍하니 서 있자 도서관 방향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선생님!”

선생님들!”

세상에, 꼴이 이게 뭐야?”

우왓!”

사쿠 군, 손잡고 일어나렴.”

 

사서 자매와 편지의 비밀을 알고 있는 타바타 문사촌의 그 사람들이었다. 하기와라는 여기에 오는 길에 몇 번 넘어졌는지 옷이 빗물로 얼룩덜룩했다.

 

사이랑 차를 마시는데 얼마 전에 산 다기 이가 빠져서…….”

영 불안하다 싶어서 사서들을 불러서 와봤는데, 기우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힘을 써야 할 일이 있을지도 몰라서 다른 선생님들도 같이 왔어요. 고양이가 엄청 화를 내서도망 나오기도 한 거지만…….”

선생님들한테는 현자의 돌이 있으니까요. 약간 감처럼 잘못하다가는 큰일 날 것 같다는 느낌이 전해져 와요.”

, 현자의 돌 굉장하다하쿠슈 선생님께도 드려줘…….”

사는 건 좀 어렵고 위에서 예산을 더 할당해서 내려준다면 드릴게요.”

, 잠깐! 사쿠, 사서 씨! 알겠지만 지금은 하쿠 씨가 중요한 게 아니야! 그래서 어쩌다 이런 꼴이 된 거야? , 시게, 발에 그거 피야? 어쩌다?!”

이런, 탓쨩코, 맨발이 됐네. 업어줄까?”

 

말이 우르르 쏟아지자 아까까지 그렇게 다급했던 것이 거짓말같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발에 묻은 것은 피가 아니라 석류를 밟은 것뿐이라고 설명하고, 게타는 저택의 연못에 빠뜨렸다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듣고 코앞의 저택을 돌아본 사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동생을 보고 언니 사서가, 나머지 세 문호도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갸우뚱 기울였다.

 

이 집에요?”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까지 멀쩡하던 저택 대신 빗속에도 거미줄이 휘감긴 대문, 무너진 돌담. 그중에서 아까 같이 멀쩡한 것은 꽃이 쏟아진 치자나무뿐이다. 닫혀 있을 터인 대문은 누군가 빗장을 두드려 부순 것처럼 미는 것만으로도 저항 없이 열렸다.

일곱 명이서 두리번거리며 (결국 호리는 아쿠타가와에게 업혔다) 들어서면 가장 먼저 무성하게 자란 잡풀과 빗자루였던 것이 분명한 지푸라기 묶음이 눈에 들었다. 깨진 징검돌 사이로도 풀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를 쓸듯 남아 있는 붉은 한쪽 발자국이 빗물에 번진 것만 빼면 멀쩡히 남아 있었다.

 

이건아무래도 내 말이 씨가 된 모양이네.”

아쿠타가와 너…….”

,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용서해 줘.”

 

길을 가로막는 수풀을 헤치고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본채가 드러났다. 하지만 역시 세월을 이기지 못한 모양새였다. 대들보에는 버섯이 자라고, 쇼지는 부서지고 구멍이 뚫려 어두운 실내가 그대로 들여다보였다. 거멓게 변색한 마루에는 나카노와 호리가 급하게 빠져나오느라 두고 온 우산이 접힌 채 놓여 있었다.

한편 징검다리는 보였지만 연못은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집을 둘러싼 연못이 있었을 자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얕은 빗물 웅덩이 말고는 물이 전부 빠진 깊은 바닥에 뿌리까지 말라버린 연꽃 줄기가 덩굴처럼 얽혀있고, 가까운 바닥에는 뒤집혀 떨어진 게타가 있었다.

 

탓쨩코 거지……?”

, 제 거예요. 저래서는 주우러 갈 수 없겠지만…… 정말 깊네요, 연못. 빠졌으면 큰일 났겠어요.”

나중에 장대를 가져와서 꺼내야겠어요.”

 

업혀 있는 호리의 발바닥이 멀쩡한지 사서들이 몰려들어 확인하는 동안 무로가 쇼지를 밀어 열었다.

 

히익, 사이, 조심해……!”

걱정 마, 사쿠. 침식자도 아니고, 여차하면 사서도 둘이나 있으니까.”

사이 씨, 그래도 조심하세요.”

알아, 알아. 걱정 말래도.”

 

조금 미는 것만으로 쇼지는 무너지듯 안으로 넘어갔다.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쪽을 사서들이 손전등으로 비추니 후스마도 비슷한 꼴로 쓰러져 방이 하나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새였다.

그 안을 종이가 뒤덮고 있었다. 벽이나 바닥을 바르듯 붙어있는 것은 모두 편지다. 거기에 있는 모두가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호리가 펜을 잡고 나카노와 함께 쓴 편지였다. 세어볼 수는 없었지만 반년 동안 보낸 모든 편지가 붙어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그 위에 터진 석류 세 알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밟고 다닌 것인지 수십, 수백, 수천, 어쩌면 수십만 개의 발자국이 개미 떼처럼 오가고 있었다. 바닥, , 천장을 가리지 않고.

대문을 넘기 전 들려온 목소리가 가려움증처럼 몸을 긁었다. 쓸 만한 종이 뭉치.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책. 이 집을 전부 바를 수 있을 만큼 두꺼운, 글씨가 쓰인 종이 뭉치들……. 나카노와 호리는 오한이 들어 몸을 움츠렸다.

발자국은 글자를 쓰고 있었다. 열린 사이로 바람이 불어 흩어져 버려 제대로 읽을 수 없었지만, 무로는 무의미한 일인 걸 알면서도 누군가 그것을 읽기 전에 무너진 쇼지를 도로 닫았다. 사서들이 우산으로 게타를 어떻게든 건져 신겼는데도 아쿠타가와는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빈 연못 속에 던져버리고 호리를 단단히 업고 달렸다. 무로와 나카노는 하기와라가 넘어지지 않도록 부축해 대문을 다시 나섰다. 지장보살처럼 쓰러진 녹슨 우편함이 발에 챘다.

그러고도 거리를 떠나 도서관에 돌아오는 길에는 내내 치자 향이 뒤를 따라왔다. 일곱 명 모두가 우산 쓰는 걸 잊은 탓에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도서관에 들어올 때까지, 그들을 걱정하며 현관에 모여 기다리고 있던 문호들의 입을 타고 결국 이 편지의 전말이 도서관 전체를 맴도는 소문이 될 때까지, 마치 석류즙이 묻은 발자국처럼 입 없는 꽃의 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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